기계와 결합된 채 꼭두각시가 된 주인공들을 기리며
사이버펑크는 근미래 사회를 다루는 SF 장르이다. 사이버펑크 속 세계는 암울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뒷골목, 레이저 의안을 단 사내가 가죽 재킷을 입고 인조인간을 쫓는다. 최근 본 사이버펑크 2077 게임의 트레일러 영상은 게임의 이름처럼 사이버펑크 자체였다. 사람들은 옷에 달린 주머니 대신 살갖 아래에 칼을 숨긴다. 주인공은 머릿 속 기억이 실제로 겪은 일인지 재생된 것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동영상을 보고 있자니 2020년 현재 사이버펑크 세상에 사는 이들이 떠올랐다. 실험실 동물들이다. 피부 안쪽에 무언가를 달고 다른 이의 목적을 위해 무대에 올라선다.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지만 자기 자신은 진실을 알지 못하는 점도 딱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다.
신경과학 연구실에서는 동물의 뇌에 전극이나 광섬유를 꽂는다. 동물의 머리에 딱 맞는 장치를 만들기 위해 금형을 제작하거나 3d 프린터를 이용하기도 한다. 뇌는 말랑말랑하고 살아있다. 두개골을 뚫어 전극을 꽂아도 고개가 흔들리면 움직이거나 빠질 수 있다. 기구를 고정하기 위해 두개골 위에 뼈만큼 단단한 합성 수지를 발라 굳힌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아물어 합성 수지 위에 피부가 덮이고 털이 자란다.
동물들이 50년은 앞서 사이버펑크를 체험하는 이유는 대의를 위해서이다. 동물들 뇌에 측정·조작 장치를 이식하는 이유는 인간 뇌의 기능을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뇌는 사람 뇌와 근본적으로 같다. 행동도 사람과 비슷하다. 쥐에게 전기충격을 가하고서 다음날 같은 곳에 두면 쥐는 몸을 사린다. 원숭이는 조이스틱을 조작하며 가상 현실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실험자는 쥐의 행동, 원숭이의 게임, 광섬유 전극 같은 장비에서 얻은 데이터를 이용해 신경 세포의 활동을 읽고 뇌 영역의 기능을 추측한다.
연구는 사람의 호기심을 해결하는 과정이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전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저울을 놓고 한 편에 사람의 호기심을, 다른 한 편에 동물의 존엄성을 매단다. 저울이 사람의 호기심 쪽으로 기울어질 때 동물 실험을 한다. 사이버펑크 세계관이 암울한 이유도 기울어진 저울 때문이다. 이번 저울의 접시에는 사람의 존엄성이 걸려 있다. 대의든 자본이든 존엄성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생길 때 사이버펑크는 도래한다. 자신의 생살을 자르고서 살갖 안에 칼을 집어넣고, 술을 안전하게 마시기 위해 복제인간을 키우고서 간을 도려내는 사회다.
사이버펑크를 막는 무기는 윤리다. 과학의 발전보다는 느리지만 연구 윤리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모든 대학과 연구소에는 실험윤리위원회가 있다. 저널에 연구를 게재하기 위해서는 윤리위원회에 연구를 승인받아야 한다. 사용할 동물의 예상 마리수를 보고해야만 비로소 실험을 개시할 수 있다. 실험 시 동물을 최소한으로 이용해야 하며, 대체 실험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실제와 보고 사항이 맞는지도 감독한다.
연구실 내부자들은 이런 윤리 규정을 귀찮아한다. 애석하게도 실험가는 연구에 익숙해질수록 사이버펑크 속 악당들과 닮아간다. 실험을 숙달하는만큼 동정심을 잃기 때문이다. 이들의 최선이란 실험을 성공해 추가 실험으로 소모되는 동물을 막는 정도이다. 하지만 그들의 크고 작은 호기심은 물론, 실험 기법을 연습하기 위해 소모하는 동물을 생각하면 '최선의 결정'도 합리화에 가깝다. 내부자가 윤리에 무뎌진 때야말로 외부의 개입이 필요한 순간이다.
동물 실험을 하는 연구 기관은 위령제를 치르기도 한다. 제사를 치른다고 죽은 동물들이 돌아오지는 않지만, 실험에 파묻힌 연구자들이 감정을 회복할 기회는 된다. 순간이나마 동물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면 족하지 않을까. 졸업이 까마득한 대학원생에게는 동물 윤리가 겉치레로만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존엄성을 매단 저울을 수평으로 올리는 일은 중요하다. 이익과 호기심에 기울어진 저울, 그 반대편에 무엇이 놓일지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