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대학원생의 이성적인 실수
흔히 합리적 사고는 훈련으로 습득할 수 있다고 여긴다. 아이에게 논술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 코딩 학원에 보내는 이면에는 그런 활동이 논리적 사고력을 키워준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하지만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은 운동으로 커지는 근육과는 다르다. 비판과 토론이 가득한 기초과학 연구실의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한 선배가 달나라 부동산을 샀다고 했다. 연구실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정평이 난 사람이었다. 달의 토지를 몇 에이커(1 acre = 약 4000m2 = 1200평) 사고서 토지 소유서를 받았다고 했다. 당장은 휴지조각이지만 대박이 될지도 모른다. 정부나 기업이 우주에 무언가를 짓기 위해서 토지 소유자에게서 땅을 사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모두는 인류가 우주에 진출해 달과 태양계 행성을 개척하리라 믿는다. 그러므로 지금 싼 가격에 달 토지를 매입하면 훗날 몇 백 배는 비싼 가격으로 땅을 되팔 수 있다.
세계적으로 우주의 토지 소유권을 합의한 조약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해 논의할 순간은 반드시 온다. 이 때 각국 정부는 사람들의 부동산 문서를 참고할 것이다. 어떤 문서를 참고하냐는 문제는 있다. 개나 소나 별을 사고 팔았다고 해서 모두의 소유권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달나라 부동산 회사는 자신 있게 답한다. 자신들은 최초로 달 부동산 거래를 계획했다. 후발 주자는 자신들을 베꼈을 뿐이므로 문서의 실효성이 없다.
설령 우주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토지소유서가 종이조각이 되더라도 큰 손해는 아니다. 부동산 사이트에서 파는 달 토지는 한 에이커 당 5만원이다. 규모를 생각하면 싼 편이다. 반면 달 토지가 거래될 때 부동산 문서가 인정받기만 한다면 수백 배의 이득을 얻는다. 봉이 김 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았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어느덧 물을 사 마시는 나라가 되었다. 이렇듯 어제의 사기는 오늘의 적법한 거래로 인정받기도 한다. 달나라 토지 매입자가 늘어나 부동산 회사가 알려질수록 누구도 부동산 문서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회사는 생각보다 유명했다. 달나라 땅은 완판된 지 오래고, 이제는 태양계 행성을 쪼개서 팔고 있었다.
달나라 부동산 이야기는 며칠 간 머릿속을 맴돌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또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닌 듯 했다. 다행히 내게는 남들보다 계약을 잘 아는 친구가 있었다. 부동산 계약에 대해 변호사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다. 변호사 친구에게 달나라 부동산 일화를 얘기해 전문가의 소견을 들었다.
변호사 친구 왈, 달나라 부동산은 사기다. 계약은 계약자가 계약을 지키지 않았을 때 대신 이행해주거나 처벌할 공권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세계 어떤 정부도 달나라 부동산 계약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맺은 계약은 돈을 주고 ‘달나라 부동산 계약서’라는 굿즈를 받은 거래일 뿐이다.
답을 듣고보니 허탈했다. 과학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이 사기를 당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돈에 눈이 멀어 합리적 사고를 갖다 버렸다기에 선배는 너무 똑똑했다. 다른 사람의 주장에 논리적 허점이 없는지 살피는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돈을 주고 종이조각을 샀으며, 이야기를 들은 나조차 넘어갈 뻔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실험실에서 훈련한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는 실험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무용지물이 되었다.
합리적 사고란 여러 정보를 추합해서 자신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선택을 내리는 사고 과정이다. 실험실에서 익힌 과학적 사고는 연구를 하는데 특화된 합리였다. 삶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필요한 정보가 실험실에만 있을 리 없다. 연구실 선배가 달나라 부동산을 산 이유는 계약이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정보가 없었을 뿐이다.
합리적인 사고 방식은 훈련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판단의 합리성이란 선택에 이르는데 이용한 정보에 비례할 뿐이다. 어떤 선택도 정보를 100% 파악하고 내릴 수는 없다. 어떤 정보를 이용할지는 각자의 지식과 역량에 달렸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기본 상식이 있다면 법이 아닐까. 합리적인 인간이 되고싶다면, 논리 퍼즐을 풀기보다는 그 시간에 법 공부를 하는 편이 낫다.
(커버 이미지: https://svs.gsfc.nasa.gov/4720)
포스텍·카이스트·서울대 대학원 소식지 포카스온에 게재되었습니다.http://pokas.gsalab.co.kr/webzine/79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