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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닥이 Feb 11. 2020

대학원생 사회도 변할 수 있을까

생명과학부 대학원 자치회 반년 활동 후기


연구실 건물 로비에는 ‘포카스 온’ 책장이 있었다. 서울대·카이스트·포스텍 이공계 대학원 소식지였다. 매일 지나치는 곳이다 보니 하루는 꽂혀있던 잡지가 눈에 띄었다. 꺼내서 읽으니 재미있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내가 쓸 법한 글을 쓰고 있었다. 나도 다른 사람이 읽을 만한 글을 쓰고 싶었다. 잡지 한 페이지에는 생명과학부 대학원 자치회가 대학원생의 원고를 기다린다는 말도 있었다. 글은커녕 일기도 쓰다 관둔 시기였다. 나는 에둘러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글쓰기 연습을 시작했고, 자치회에 가입했다.


반년이 지났다. 이제는 자치회 일에서 소속감을 느낀다. 자치회에 오지 않았더라면 자연대 지하주차장 구석에는 으슥한 골방이 있고, 그곳에서 어떤 일을 생기는지 알지도 못한 채 학위만 달랑 받고 졸업할 뻔했다. 심지어 우리 학교 이공계 대학원 학생회는 생명과학부가 유일하니, 행정 상 생명과학부 학생도 아닌 나는 운도 좋았다.


생명과학부 자치회 로고


대학원생들은 제 불행 자랑하기를 즐긴다. 오죽하면 ‘대학원생 개그’ 가 따로 있을까. 학생들은 자신에게 닥친 환경이 불합리하다는 걸 알만큼은 예민하지만, 바꿀 생각을 안 할 만큼은 현실적이다. ‘졸업하면 끝나는’ 처지도 문제 해결 의지를 꺾는다. 상황을 바꾸려 노력할 시간에 실험 한 번 더 하면 논문도 빨리 나올 것이고(아니다), 졸업도 ‘제때’할 수 있다(그럴 리가). 결국 아무도 자기 일에 손대지 않는다. 대신 연구실에서 겪은 기가 막힌 일을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풀어낸다. 학교 앞 술집이라면 아는 사람라도 있을까봐 말을 끊고 주위를 두리번대며.


서른 살이 되어 이 짤을 다시 보니 마음이 복잡하다


선배 중 누군가는 이런 형편을 바꾸고 싶었나 보다. 그는 학부 대학원 자치회를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 자치회는 생명과학부 학생들의 투표로 회장을 뽑는다. 대학원생 집단의 대표성도 생긴 셈이다. 격주로 골방에서 회의를 한다. 불합리한 제도를 인식하고, 어떻게 바꿔야 할지를 토의한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세미나를 기획하기도 한다. 작년에는 웹툰 작가 닥터베르의 세미나를 열었다. 주제는 대학원생의 결혼과 육아였다. 작가 블로그를 뒤져 메일 주소를 찾아 메일을 보내 승낙을 받아온 친구를 보며, 내가 자치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 대학원생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는, 권력이 아니라 상상력에 달린 일이었다.


포카스온 담당이 되면서는 포스텍과 카이스트 대학원 학생회 사람들을 만났다. 그분들 이야기를 들으며 대학원생이 대학원생을 위해 제도를 만들 가능성을 알았다. 과학기술부든 BK21 플러스(국가 주도 연구 역량 강화 사업)든, 정부 부처는 대학원생의 의견을 들으려고 한다. 사람들은 노조를 만들거나 정책 토론회에 참여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쉽지 않아 보였다. 어떤 사회 집단이든 제 권리를 찾는 길은 수고롭기 때문이다.


전국 대학원생 노동조합(https://www.facebook.com/graduunion/, https://graduunion.or.kr/)


제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첫걸음은 뜻이 같은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열 명 남짓한 자치회가 대학원생 열 명이 못 하는 일을 하는 이유는, 서로 말을 들어주고 함께 일을 추진하기 때문이다. 어떤 학교의 대학원생이든 스스로 뭉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바쁜 일정 중 몇 시간이 사라질 수는 있다(생과부 자치회의 좋은 점은 그럴싸한 이름에 비해 들이는 시간은 크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그럼에도 함께 있을 때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느끼는 감각은 소중하다. 우리는 학생이기 앞서 한 사람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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