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 생물학의 매력
고등학생 때 과학탐구 교과목으로 생물을 선택했다. 스물한 살, 생명공학을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왔다. 이후로 분자생물학은 내 삶을 밀고 당겼다.
2학년이 되며 분자생물학 실험을 배웠다. 원하는 유전자를 나머지 DNA에 맞추어 넣는 ‘서브클로닝’이었다. 실험은 이론만큼 재미가 없었다. 기어코 분자생물학을 피해서 수업을 들었다. 졸업 후 입학하겠다고 찾아간 연구실도 분자생물학 실험을 하지 않아서 선택한 곳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생물학이란 <종의 기원>에 나오는 동물 관찰 기록이나 <랩 걸>의 호프 자런처럼 나무 한 종에 대해 찬사를 바치는 일이었다. 분자생물학은 달랐다. 실험은 튜브 속 액체를 파이펫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교과서 속 화려한 이중나선 삽화는 새끼손가락 만한 튜브 속에 든 투명한 액체가 되었다. 이중 나선에 붙는다는 단백질 덩어리도 튜브 속에 든 걸쭉한 액일 뿐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볼 수도 없었다. 실험의 화려함이란 튜브를 꽂아둔 플라스틱 랙의 색깔에만 있었다.
삶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과학과 관련 없는 이유로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했다. 내 전공으로 갈 수 있는 곳은 생명공학 회사뿐이었다. 회사에서 배정받은 부서도 세포 실험 부서였다. 매일 대학생 때 피해 다니던 실험을 했다. DNA를 옮기고 늘리고 세포를 배양했다. 분자생물학 공포증을 노출 치료로 극복했다. 삶에 선택지가 늘어났다. 회사를 그만두고 분자생물학을 이용하는 대학원에 들어갔다.
대학원에 와서 보니 분자생물학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언어와도 같았다. 문법을 배우면 자연에 말을 걸고 생명을 조작할 수 있다. 대장균은 하룻밤만에 DNA를 수백만 배로 증폭시키고, 증폭된 DNA는 단백질이 되어 몸속으로 들어간다. 언어답게 내용이 달라도 형식은 같다. 회사든 대학원이든 서브클로닝 과정은 동일했다. ATCG가 잔뜩 늘어선 프로그램으로 실험을 계획하고 액체를 옮겨 반응시켰다. 결과는 목적에 따라 달라졌다. 단백질은 특정한 암세포만 선별해 없애기도 하고 쥐를 멋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자연을 앞에 두고 바둑을 둔다면, 분자생물학은 바둑의 규칙이고 실험 각각은 한 수(手)에 해당했다. 승패는 단백질이 얼마나 완벽한지에 달렸다.
분자생물학과의 밀당도 내년이 마지막이다. 3년 전과 비슷한 이유로 내 삶은 또 계획을 벗어났다. 분자생물학을 연구한 3년 간 기술이 세상을 바꾸는 과정을 배웠다. 대학생 시절까지 합치면 상상과 실제가 어떻게 다른 지도 알았다. 실제는 상상과 달랐지만, 상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