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캬닥이 Jan 20. 2020

다시는 실험가를 무시하지 마라

과학 뒤에는 실험가가 있다

최근 과학 개념을 다루는 칼럼 하나를 읽었다. 퍽 마음이 답답했다. 개념을 너무 얼렁뚱땅 설명하는 바람에 이해할 독자가 있을까 의심스러운 글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글 한 편이었다. 왜 기분이 상했는지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필자는 글감을 선택할 자유가 있고 독자는 글을 골라 읽을 자유가 있지 않은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동료들이 겪은 고된 몇 년이 몇 문장으로 압축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칼럼의 과학 개념은 석사 전공이었다. 나는 2년도 채 몸담지 않았던 전공에 감정 이입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가장 재미없는 부분을 생략하기 마련이다. 과학을 다룬 글은 과학적 사실을 자세하고 재미있게 설명하는데 집중한다. 과학은 노동 집약적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글은 결론을 이끌어낸 사람들의 노고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실재와 상관없지만 멋있어 보이는 이 파란 DNA 삽화처럼


실험실 과학은 통계로 이루어진다. 통계란 관찰로 보이는 세상의 편린으로 전 세상을 가늠하는 방법이다. 서른 명의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로 전체 중학생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식이다. 이때 중학생 전체를 모수라고 하고, 조사한 중학생 서른 명을 표본이라고 한다. 통계와 실험실 노동 사이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간단한 통개 개념을 하나 소개한다. 




통계로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 통계에서 일어나는 오류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가설이 실제로는 옳지만 거짓이라고 착각하는 오류(1종 오류, false positive), 다른 하나는 실제로는 아니지만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오류(2종 오류, false negative)이다. 중학생 서른 명에게 우울증 자가 진단 테스트 10문항을 나눠주었다. 이중 우울 증세가 있는 아이들에게는 전문 상담 치료를 할 예정이다. '예'라고 답한 문항이 유독 많은 아이들이 있다. 이 아이들의 '예' 대답 수의 평균이 8개이니, 그보다 하나를 뺀 7개를 우울증 기준이라고 하자.


울상이는 매일이 우울하다. 하지만 스스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웃상이는 매일이 즐겁지만 하필 그날 좋아하던 가수의 콘서트 티케팅을 놓쳤다. 특히 '세상이 나를 위해 돌아가지 않는다'는 문항은 딱 자기 이야기다. 전부 '예'라고 체크했다. 둘 다 '예'를 6개 체크했다.


우울증 진단 기준에 따라 울상이는 1종 오류, 웃상이는 2종 오류가 될 수 있다.


한 오류를 줄이면 다른 오류가 늘어난다. 지금 기준 ('예'가 7개 이상)으로는 울상이는 우울증 진단을 받지 않는다. 1종 오류에 해당한다. 1종 오류를 줄이기 위해 우울증을 진단하는 '예'의 개수를 6개로 줄여보자. 이제 우울증 증세가 없는 웃상이가 우울증 진단을 받는다. 1종 오류 하나를 줄였지만 2종 오류가 생겨났다. 이쪽 오류를 줄이면 저쪽 오류가 늘어난다. 결국 기준은 상황에 따라 중요하지 않은 오류를 희생해서 정해야 한다. 이번 경우라면 울상이를 구해내는 편이 중요하다. 웃상이는 상담 첫 시간에 자신은 그렇게 우울하지 않다고 말하면 끝날 일이기 때문이다.


두 오류를 한 번에 줄이는 방법이 있다. 표본의 개수를 늘리면 된다. 중학생 서른 명이 아니라 3천 명으로 통계를 구한다. 울상이와 웃상이는 예외적인 아이들이다. 대부분 학생들은 문항에 솔직하게 답할 것이다. 그러면 유독 우울한 아이들 집단이 보일 것이다. 이들을 기준으로 '예'의 개수를 정하면 된다. 


표본의 개수를 늘리는 일은 옳게 들린다. 양측 오류를 줄인다니 솔깃하다. 그러나 실험실 과학에서 표본을 늘리는 일은 같은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통계의 희생양은 생긴다. 이번에는 오류를 줄이는 대신 실험가의 시간이 희생된다. 중학생 3000명을 모으고 설문조사지를 돌리는 일은 힘들겠지만, 적어도 학생들은 스스로 조사지를 체크할 수 있다. 그런데 집 밖에서 사는 강아지의 우울 증세를 알아보는 실험이라면? 실험가는 3000마리의 강아지를 6개월동안 관찰하며, 개들이 우울한지 그렇지 않은지 조사해야 할 것이다.



https://news.joins.com/article/15815301


쥐에게 가짜 기억을 주입하는 실험을 생각해보자. 오만 가지 과학적 사실과 기법이 모여 이루어진 성과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지식을 이해하고 실제로 옮길 사람이 필요하다. 위 삽화의 모든 단계에 사람이 필요하다. 유전자를 바이러스에 집어 넣는다. 바이러스를 뇌에서 기억을 다루는 부위에 주입한다. 쥐를 특정 환경에 놓고 레이저를 조작한다. 모두 숙련된 전문가가 행하는 일이다.


실험실 일상이란 실험 대상과 씨름하며 보내기가 대부분이다. 누군가는 하루 종일 쥐를 붙잡고 수술을 했다. 눈을 현미경에 박고서 쥐 한 마리의 두개골을 두세 시간동안 보며 조작한다. 통계를 내기 위해서는 실험 결과가 여덜 번은 있어야 하니, 매일 이런 수술을 일고여덟 마리씩 반복해야 한다. 같은 하루 누군가는 신경세포를 갖고서 똑같은 일을 한다. 수술 결과가 좋았는지, 주사한 DNA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는 실험이 끝난 한참 후에야 알 수 있다. 어느 단계에서든 실수가 있었다면 결과를 버려야 한다. 버려진 결과를 메꾸고 통계가 견고해지도록 모든 단계를 반복해야 했다.


이 글의 제목은 과장되었다. 아무도 실험가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들이 있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은 사람들의 관심이 유독 결과에 몰리는 분야다. 과학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 사람은 물론, 미래에 과학을 하겠다는 과학 꿈나무마저 흥미로운 과학적 현상과 결과만 볼 뿐이다. 과학을 하는데는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궁금해하는 호기심과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이해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과학이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은 기술을 숙련하는 성실함과 똑같은 과정을 반복해도 버틸 수 있는 인내력이다. 


사람들이 실험실에서 일하는 과학자들을 사람들이 많이 알아주면 좋겠다. 이미 영웅이 된 과학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배양기에서 세포를 꺼내고, 원심분리기에 샘플을 옮겨 담는 사람들 말이다.


이전 02화 비인간과 마주하는 하루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