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라 Apr 29. 2024

샤워 중에 쓰러지다

       샤워하다가 허리를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은 날, 나는 처음으로 구급차 신세를 졌다. 다니던 정형외과로 가서 마약성 진통제를 맞았다. 진통제는 효과가 빨랐다.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통증이 사라졌고 내 의식도 사라졌다. 공간이동이라는 현상을 실제로 체험해본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며칠 입원해 있으면서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결국 C대학병원으로 갔더니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PET-CT 촬영이 필요하다고 했다. 대학병원 통증의학과 의사가 남편 친구였는데 그는 진작부터 내 병을 다발성골수종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확실한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그 병명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 병에 걸렸다고 상상만 하는 것도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무서운 병이었기 때문이다. PET-CT를 찍기 위해서 먼저 방사성약품을 주사하고 잠시 휴식한 후 촬영실에 들어간다. 

    며칠 후 PET-CT 촬영 결과를 들으러 갔다. 최대한 많은 수의 가족과 지인을 모시고 오라고 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누구를 모시고 가야 할까. 일단 대전에 사는 분 중에서는 남편의 큰형님 내외를 모시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시부모님이나 친정 부모님은 연로하셔서 혹여 나쁜 소식을 들으면 충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분들이 나의 병에 대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L목사님과 K사모님 내외를 생각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의아했다. 그분들은 안산에 사는 분들인데 왜 그분들을 불렀을까?


    직접 물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 같아 사모인 K언니에게 전화했다. 그녀에 의하면 그 당시 그녀와 나는 지금보다 훨씬 자주 전화를 했다고 한다. 신혼 초부터 툭하면 그녀에게 전화하여 고민상담을 했던 것은 기억나지만 쉰이 다 되어서도 언니를 괴롭게 했었던 것까진 몰랐다. 하여간 그래서 자주 전화하던 사이다보니 교수를 만날 때 동행해달라고 쉽게 부탁했었나보다. 

    언니는 내가 자기들을 부른 것이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나쁜 소식을 들으면 감정적이 되어서 의사의 말을 정확하게 인식하거나 기억하는 데 오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극단적 F형인 친정 부모님은 환자인 나보다 더 절망에 빠질 것이 뻔했다. 그리고 이건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 이유인데,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다발성골수종 사례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지 결정하는 데는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았다. 비용대비 효과를 생각한다면 대전에서 치료받는 것이 옳았지만, 그건 낫는다는 전제하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희귀병인 다발성골수종 사례는 서울 S병원의 M교수가 가장 많이 접하고 있다는 정보를 L목사님이 찾아내셨다. 그 얼마 전 목사님 지인이 나와 같은 병에 걸렸었기 때문에 목사님은 그 병에 대해 이미 리서치를 하고 있었다.


    나의 시댁은 충청도 양반이라 남의 일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지만 정작 자신들의 일에는 매우 소극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절대 오버하지 않는, 유난떨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아주버님이나 남편이나 그냥 대전에서 치료받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목사님이 반드시 서울로 가야한다고 남편을 설득했다. 목사님이 거의 울먹이며 말씀하시는 통에 남편은 따를 수밖에 없었나보다. 교수는 앞으로 내가 더 살 수 있는 시간을 44개월로 본다고 했다는데(나는 그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충격을 받아서 기억이 마비된 것일까) 그 사실도 남편으로 하여금 더 나은 치료를 받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한 것 같았다. 

    결전의 날이 왔다. 대학병원의 혈액내과 교수가 이 재수 없는 병을 선고하는 재수 없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죄송하다는 말로 입을 뗐다. 살아오면서 의사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환자가 나쁜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 의사로선 가장 하기 싫은 일 중 하나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사실 미안하게 생각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을까. 그런 몹쓸 병에 걸려가지고 의사를 난처하게 했으니 말이다. 

    누군가에게 며칠 안에 죽는다는 사망선고를 한다면 그 교수와 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어떠한 희망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역력했다. 그는 진단명과 증상에 대한 간단한 설명만 했지 치료과정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았다. 설명을 들은 우리 일행은 그 병의 실체를 알지 못했지만, 의사의 표정으로 그 심각성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다발성골수종의 옛 이름은 골수암이었다. 더 정확한 진단을 위해 골수검사가 필요하다고 하여 나는 일단 그 병원에 입원했다. 진단 기술은 C대학병원도 충분히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죽을 것처럼 피곤한 나날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