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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Apr 29. 2024

샤워 중에 쓰러지다

다발성골수종을 확진받다

    샤워하다가 허리를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은 날, 나는 처음으로 구급차 신세를 졌다. 당시 통증 치료차 다니던 K 병원으로 가서 마약성 진통제를 맞았다. 진통제는 효과가 빨랐다.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통증이 사라졌고 내 의식도 사라졌다.

    며칠 입원해 있으면서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결국 충남대학병원으로 갔더니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PET-CT 촬영이 필요하다고 했다. 남편 친구인 통증의학과 교수는 K병원에서 받아온 자료를 보고 내 병을 다발성골수종으로 의심하였으나 확실한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그 병명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 병에 걸렸다고 상상만 하는 것도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무서운 병이었기 때문이다. PET-CT를 찍기 위해서 먼저 방사성 약품을 주사하고 잠시 휴식한 후 촬영실에 들어갔다.

 

    며칠 후 PET-CT 촬영 결과를 들으러 갔다. 최대한 많은 수의 가족과 지인을 모시고 오라고 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누구를 모시고 가야 할까. 일단 대전에 사는 분 중에서는 남편의 큰형님 내외를 모시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시부모님이나 친정 부모님은 연로하셔서 혹여 나쁜 소식을 들으면 충격을 받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그분들이 나의 병에 대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L 목사님 내외를 떠올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다. 그분들은 안산에 사는 분들인데 왜 그분들을 불렀을까?


    직접 물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 같아 사모인 김기은 언니에게 전화했다. 그녀에 의하면 그 당시 그녀와 나는 지금보다 훨씬 자주 통화했다고 한다. 신혼 초부터 툭하면 그녀에게 전화하여 고민상담을 했던 것은 기억나지만 쉰이 다 되어서도 언니를 괴롭게 했었던 것까진 몰랐다. 하여간 그래서 자주 전화하던 사이다 보니 담당교수를 만날 때 동행해 달라고 쉽게 부탁했었나 보다.

    언니는 내가 자기들을 부른 것이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나쁜 소식을 들으면 감정적이 되어서 의사의 말을 정확하게 인식하거나 기억하는 데 오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슈퍼 F형인 친정 부모님은 당사자인 나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을 것이 뻔했다.

    게다가 우리는 L 목사님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다발성골수종 사례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비용대비 효과를 생각한다면 대전에서 치료받는 것이 옳았지만, 그건 낫는다는 전제하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희귀병인 다발성골수종 사례는 서울성모병원의 민창기교수가 가장 많이 접하고 있다는 정보를 L 목사님이 찾아내셨다. 그 얼마 전 목사님 지인이 나와 같은 병에 걸렸었기 때문에 목사님은 그 병에 대해 이미 리서치를 하고 있었다.


     다시 결전의 그날을 회상해 본다.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암병동 복도를 지나 교수 연구실까지 걸어가면서 보니 환자들이 죄다 스님들처럼 까까머리였다. 참으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현대적인 시설의 대학병원 로비에는 안락한 의자에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가득 앉아 있는데 불과 몇 층 위에는 수도승 같은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다. 이 사람들과 나는 어떤 관계일까?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했던 것 같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담당교수였다. 그는 사형선고를 처음 내려 보는 판사처럼 어쩔 줄을 몰라하였다. 냉정하게 보이지도 않고 감상적이 되지도 않으려 애쓰는 그의 노력이 측은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간 우리 일행은 그의 태도를 보고 내 병이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대단히 죄송합니다만”으로 시작된 그의 설명은 충격적이라기보다는 다소 지루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인간적인 모습이었는데 그 순간에는 이런 일을 많이 해보지 않은 사람의 서투름만이 느껴졌다.     

    살아오면서 의사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환자가 나쁜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 의사로선 가장 하기 싫은 일 중 하나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사실 미안하게 생각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을까. 그런 몹쓸 병에 걸려가지고 의사를 난처하게 했으니 말이다.

    누군가에게 며칠 안에 죽는다는 사망선고를 한다면 그 교수와 같은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어떠한 희망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역력했다. 그는 다발성골수종 2기라는 진단명과 증상에 대한 간단한 설명만 했지 치료과정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았다. 설명을 들은 우리 일행은 그 병의 실체를 알지 못했지만, 의사의 표정으로 그 심각성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의 시집 식구들은 충청도 양반이라 남의 일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지만 정작 자신들의 일에는 매우 소극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절대 오버하지 않는, 유난 떨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아주버님은 별말씀이 없으셨고 남편 역시 그랬다. 그런데 가족도 아닌 L 목사님이 반드시 서울로 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셨다. 교수는 앞으로 내가 더 살 수 있는 시간을 44개월로 본다고 했다는데 (기은 언니가 해준 말인데 나는 그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충격을 받아서 기억이 마비된 것일까?) 그 사실도 남편으로 하여금 더 나은 치료를 받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 같았다.

    더 정확한 진단을 위해 골수검사가 필요하다고 하여 나는 일단 충남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일기 발췌_2010년 1월 16일(확진 하루 전날)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는 물리적인 자아가 실존하는지의 여부에 있을까? 만약 내가 1년 후에 신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치면 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마흔에 죽은 내 친구 Y의 존재는 나에게 그에 대한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운동장에서 하늘의 별은 별사탕처럼 뾰족뾰족한 모양이라고 우겼던 그녀, 그의 집에 처음 갔을 때 달려들어 환영해 주었던 스피츠들, 처음 맛보았던 간식거리들, 10대와 20대 때 찬란하게 빛났던 그녀의 아름다움, 30대에 다시 만난 후 나를 전적으로 의지했던 그녀의 연약한 성품, 몇 명의 남자에게 상처받았던 그녀의 마음, 맹목적 사랑의 대상이었던 그녀의 아들, 이런 기억의 조각들이 Y다.  
    지금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눈을 감으면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를 때의 독특한 억양과 꾸미지 않은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천국에 가면 그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정말로 천국이 있을까? “좋은 곳에 갔을 거야”라는 말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닐까?
    오늘 밤을 꼬박 새운다. 내일의 선고를 나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일기 발췌_2010년 1월 17일(확진받은 날)

    L 교수의 표정에는 미안함이 역력했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지 못하여 미안해하는 마음.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면 불치의 병도 손실만은 아니다.
    H는 어제 통화에서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펼쳐놓고는 자기 혼자 심란하였나 보다. 잠을 못 잤다고 했다. 나를 위해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다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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