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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Apr 29. 2024

죽을 것처럼 피곤한 나날들

    2009년은 박사학위를 받은 지 3년차에 접어들던 해였다. 둔산동 집에서 궁동으로 강의하러 가는 아침이면 초록의 향연이 펼쳐졌다. 내 인생에 이런 풍경이 허락되었다는 사실에 전율하면서 아침마다 학교로 출근했다. 막내가 5살이었다. 

    학위 논문 쓰느라 엄마가 학교에 처박혀 있는 동안 아이는 육아도우미와 함께 시간을 보냈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를 두고 집을 나설 때면 아이가 주는 기쁨을 놓치는 것이 아깝다 생각하면서도 박사학위라는 목표에 떠밀려 아이와 작별했었다. 학위를 받은 다음에 나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신록처럼 파릇한 청년들을 상대로 강의하는 일은 나를 설레게 했다.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나의 잠재력과 만나는 시간이었고 통장에 들어오는 급여는 내가 드디어 쓸모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점점 늘어나는 강의시간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여름방학을 보낸 후 가을학기가 막 시작되었던 9월 초의 어느 날, 별로 친하지도 않은 대학원 동기가 K대학 산학협력단의 연구원 자리를 제의했다. 그녀가 일하던 곳이었는데 자신이 다른 곳에 스카웃되는 바람에 자리가 비게 되었다고 했다. 근무기간이 6개월밖에 남지 않아서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녀는 무척 다급해보였다. 나의 사정이나 의향 보다는 자신의 필요가 더 중요한 것처럼 굴어서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한 번 가보는 것쯤은 해롭지 않을 것 같아서 그 학교를 방문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쪽에서는 내가 부임하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나는 그날 업무내용과 업무환경을 알아보러 간 것이었는데 연구소장이라는 분은 당일 저녁에 환영회를 하자고 했다. 그분은 겨우 6개월 근무할 직원을 뽑는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대학원 동기나 연구소장의 사적인 필요에 등 떠밀려 얼떨결에 K대학 산학협력단에 출근하게 되었다. 

    근무환경도 별로 좋지 않고 내게 유난히 불친절하게 구는 연구원이 있어서 불편했지만, 그가 나란 사람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고 또 길지도 않은 기간 동안 내게 주어진 일이나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다.


    기왕에 수락했던 강의들이 있었기에 강의와 K대학 근무를 겸하다보니 과로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연구소장이 말한 근무시간은 시간이 가면서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어린아이가 있어서 9시 출근이 어렵다고 말했을 때는 양해한다고 했기에 제의를 받아들인 것인데 시간이 갈수록 나만 늦게 출근하는 것이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와 동료들이 주는 심리적 압박은 엄청난 피로감을 유발했다. 주말 내내 쉬어보아도 피곤함이 풀리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 납덩이같은 몸을 이끌고 출근하여 금요일까지 버티는 것이 벅찼다. 날이 추워지면서 피로감은 극에 달했다. 연말이 되었을 때 나는 이러다 죽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늘 피곤에 쩔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죽을 것처럼’이란 말은 은유에 불과했다. 

    사무실 사람들도 나의 건강이상을 눈치 챘다. 허리가 너무 아프다고 하니 나를 걱정하는 동료들이 있는 반면 예의 그 불친절한 연구원은 나의 병을 제멋대로 진단하며 처방까지 내려주었다. 척추강 협착증이 틀림없다며 자신이 그 병을 앓았을 때 나은 방법을 쓰라고 했다. 정확한 병명도 모르면서 증상만 가지고 남의 병을 잘 아는 척 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질병이다. 


    나는 결국 집에서 쓰러졌고 다발성골수종 진단을 받았다. 나는 남은 두 달을 채우지 못하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대학원 후배 한 사람이 후임으로 왔다는 것을 듣고 나는 그를 입원실로 불러 인수인계를 했다. 내가 아무런 가이드도 받지 못한 채 업무를 익히느라 허비한 시간을 그녀까지 겪게 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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