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하다가 허리를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은 날, 나는 처음으로 구급차 신세를 졌다. 다니던 정형외과로 가서 마약성 진통제를 맞았다. 진통제는 효과가 빨랐다.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통증이 사라졌고 내 의식도 사라졌다. 공간이동이라는 현상을 실제로 체험해본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며칠 입원해 있으면서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결국 C대학병원으로 갔더니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PET-CT 촬영이 필요하다고 했다. 대학병원 통증의학과 의사가 남편 친구였는데 그는 진작부터 내 병을 다발성골수종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확실한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그 병명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 병에 걸렸다고 상상만 하는 것도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무서운 병이었기 때문이다. PET-CT를 찍기 위해서 먼저 방사성약품을 주사하고 잠시 휴식한 후 촬영실에 들어간다.
며칠 후 PET-CT 촬영 결과를 들으러 갔다. 최대한 많은 수의 가족과 지인을 모시고 오라고 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누구를 모시고 가야 할까. 일단 대전에 사는 분 중에서는 남편의 큰형님 내외를 모시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시부모님이나 친정 부모님은 연로하셔서 혹여 나쁜 소식을 들으면 충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분들이 나의 병에 대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L목사님과 K사모님 내외를 생각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의아했다. 그분들은 안산에 사는 분들인데 왜 그분들을 불렀을까?
직접 물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 같아 사모인 K언니에게 전화했다. 그녀에 의하면 그 당시 그녀와 나는 지금보다 훨씬 자주 전화를 했다고 한다. 신혼 초부터 툭하면 그녀에게 전화하여 고민상담을 했던 것은 기억나지만 쉰이 다 되어서도 언니를 괴롭게 했었던 것까진 몰랐다. 하여간 그래서 자주 전화하던 사이다보니 교수를 만날 때 동행해달라고 쉽게 부탁했었나보다.
언니는 내가 자기들을 부른 것이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나쁜 소식을 들으면 감정적이 되어서 의사의 말을 정확하게 인식하거나 기억하는 데 오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극단적 F형인 친정 부모님은 환자인 나보다 더 절망에 빠질 것이 뻔했다. 그리고 이건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 이유인데,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다발성골수종 사례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지 결정하는 데는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았다. 비용대비 효과를 생각한다면 대전에서 치료받는 것이 옳았지만, 그건 낫는다는 전제하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희귀병인 다발성골수종 사례는 서울 S병원의 M교수가 가장 많이 접하고 있다는 정보를 L목사님이 찾아내셨다. 그 얼마 전 목사님 지인이 나와 같은 병에 걸렸었기 때문에 목사님은 그 병에 대해 이미 리서치를 하고 있었다.
다시 결전의 그 날을 회상해본다. C 대학병원의 혈액내과 교수가 이 재수 없는 병을 선고하는 재수 없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죄송하다는 말로 입을 뗐다. 살아오면서 의사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환자가 나쁜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 의사로선 가장 하기 싫은 일 중 하나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사실 미안하게 생각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을까. 그런 몹쓸 병에 걸려가지고 의사를 난처하게 했으니 말이다.
누군가에게 며칠 안에 죽는다는 사망선고를 한다면 그 교수와 같은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어떠한 희망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역력했다. 그는 진단명과 증상에 대한 간단한 설명만 했지 치료과정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았다. 설명을 들은 우리 일행은 그 병의 실체를 알지 못했지만, 의사의 표정으로 그 심각성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의 시댁은 충청도 양반이라 남의 일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지만 정작 자신들의 일에는 매우 소극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절대 오버하지 않는, 유난떨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아주버님은 별 말씀이 없으셨고 남편 역시 그랬다. 그런데 가족도 아닌 L 목사님이 반드시 서울로 가야한다고 강하게 말씀하셨다. 교수는 앞으로 내가 더 살 수 있는 시간을 44개월로 본다고 했다는데(나는 그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충격을 받아서 기억이 마비된 것일까) 그 사실도 남편으로 하여금 더 나은 치료를 받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한 것 같았다.
다발성골수종의 옛 이름은 골수암이었다. 더 정확한 진단을 위해 골수검사가 필요하다고 하여 나는 일단 그 병원에 입원했다. 진단 기술은 C대학병원도 충분히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