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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Jun 01. 2024

큰딸이 찾아낸 2010년 다이어리

    음력설을 앞두고 큰딸 가족이 다녀갔다. 다른 때보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인지 딸은 서재에 있는 오래된 사진앨범들을 정리해주겠다고 나섰다. 결혼 전 사진부터 시작하여 결혼식 사진, 아이들이 태어난 후 찍은 사진들이 한 사람당 여러 권의 앨범에 들어있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부터는 종이사진을 만들지 않아서인지 2000년대 들어서 찍은 사진은 거의 없었다.      

    사십 년 이상 쌓인 사진의 부피와 무게는 엄청난 것이어서 서재 벽을 가득 채운 책장 위 공간의 반을 앨범이 차지하고 있었다. 비슷한 사진이 많아서 꼭 소장할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가차 없이 버렸다. 옛날엔 사진이 잘 나왔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한 장면을 여러 번 찍었고, 그러다 보니 비슷비슷한 사진이 많았다. 옛날 사진을 보면서 새삼 딸들과 손녀들이 얼마나 많이 닮았는지 알게 되었다. 우리 딸들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니 지금 손녀들과 분간되지 않았다.

두 딸의 어린 시절 모습

    수십 년 된 앨범은 접착력이 떨어지거나 비닐 속지가 낡아져서 사진이 떨어지고 비어져 나와 있었다. 적어도 십 년에 한 번씩은 사진 정리를 했어야 하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들은 옛 사진을 다시 카메라로 찍어서 파일로 보관한다고 들었다. 나는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외부저장소에 저장했는데 어디에 무슨 사진이 들어 있는지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종이책을 고수하는 우리 세대는 사진도 손에 만져지는 것을 더 선호한다. 

    큰딸이 보기에 엄마의 서재가 너무 정리되지 않았었나보다. 딸 덕분에 사진을 많이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 남겼다. 사진을 정리하는 와중에 2010년도 다이어리 하나를 찾았는데 겉표지를 열어보니 책날개에 봉투 두 개와 작은 수첩에서 찢어낸 듯한 메모지 두 장이 끼워져 있었다. 봉투 하나에는 1만원 문화상품권 2장이 들어 있었는데 발행일자가 2009년이고 유효기간은 5년이었다. 아뿔싸! 그리고 다른 봉투에는 성oo 권사님 축의금이라고 쓰여 있었다. 2010년이면 내가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고 서울로 가서 치료를 받은 해이다. 그해에 성권사님 아들이 결혼을 했는데 내가 간다고 하고 못간 것일까? 나중에 확인해보니 맞았다. 권사님도 혹시나 하여 그때 적어놓은 축의금 목록을 확인해보니 내 이름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권사님께 “제가 뒤늦은 부조를 할 테니 밥을 사세요.” 했고 우리는 삼 년 만에 만나 회포를 풀었다.            

    메모지 하나에는 칼국숫집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는데, 시어머님의 필체로 보였다. 다른 하나에는 시스엘르, 거성닷컴, 누리메디칼, 가발나라 등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항암 치료 후 빠진 머리를 가리기 위해 가발을 사려고 적어놓은 연락처인 듯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맞춤 가발이 백만 원을 넘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저렴한 것을 여러 개 맞추었는데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서 모자를 쓰고 다녔던 것 같다. 맞다. 이런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속표지에 일본어로 주소 하나가 쓰여 있었다. 이건 분명 둘째가 일본에 있을 때의 숙소 주소다. 동경도 중야구 동중야 4-30-16 그리고 아파트 이름과 호수가 나와 있었다. 둘째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직장에 다니다 동경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다. 내가 병을 진단받았을 때 딸은 어학원을 수료하고 한 미용업체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다. 혼자 사는 것이 너무 외로워서 밤에는 단 것을 폭풍 흡입 한다던 딸이 간신히 적응해가는 시기였다. 딸은 자기가 돌아오는 게 좋겠냐고 물었고 나는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네가 오는 것이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고. 당시에 나는 딸과 편지를 몇 번 주고받았는데, 진지함이라면 질색하는 딸도 편지로는 엄마에게 살가운 말을 많이 해주었었다.

        

2010년 다이어리 1월 일정표

    월별 일정표를 보니 1월 19일에는 ‘초진’이라고 쓰여 있었고, 21일에는 ‘덱사메타손 복용 시작’이라고 쓰여 있었다. 23일에는 ‘C 신경정형외과 입원’, 26일에는 ‘S 병원 입원’, 27일에는 ‘진료’, ‘뼈 주사’, ‘초음파’라고 쓰여 있었다. 2월 1일에는 ‘덱사메타손 주사제 시작’, 2월 6일에는 ‘퇴원’, 2월 16일에는 ‘외래진료’, ‘뼈 주사’, ‘대전행’이라고 쓰여 있었다. 2월 17일에는 ‘덱사메타손 3차 투약 시작’, 2월 23일에는 'S 병원 외래, 혈액검사, 수액'이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뒤죽박죽 기억하고 있는 사실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맞다. C 대학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다음 날 S 병원으로 갔지만 약 처방만 받고 내려왔다. 사흘 후 나의 단골 병원인 C 신경정형외과에 입원했는데 그 이유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집에서 지내는 것이 나도 요양이 안 되고 가족들에게도 불편을 끼쳐서였을까? 서울에서 처방받은 대로 덱사메타손을 한 번에 40알씩 하루 3번 먹었는데 약만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이 약은 스테로이드제라서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그곳에서 여러 지인들의 방문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다니던 연구소 일을 인수인계하기 위해 후임자가 찾아오기도 했다. C 병원에 입원한 지 사흘 만에 S 병원에 입원했다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열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담당 교수는 열이 나면 지체 없이 응급실로 오라고 했었다. 혈액암 진행 과정에 열이 난다는 것은 촌각을 다투는 위험한 징후인 것 같았다.


    S 병원에 입원해 있는 열흘 동안 많이 아팠다.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하면 신기하게도 통증이 사라졌지만, 밤마다 고열에 시달렸다. 친정엄마가 옆에서 나를 간병했다. 엄마는 계속해서 시편을 읽고 기도를 해주셨는데 큰 위안이 되었다. 엄마가 지칠까 봐 하룻밤은 집에 가시게 하고 사촌 언니가 와서 곁을 지켜주었다. 그날 하루를 제외하고는 엄마가 매일 병원에 계셨다. 우리 엄마는 정말 강한 사람이다. 당시 연세가 70대 중반이었는데 지치지도 않았다. 몇 년 후 아버지가 입퇴원을 반복할 때도 엄마는 늘 아버지 옆에서 간병하셨다. 지금 60대 중반인 나는 가족이 아플 때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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