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설을 앞두고 큰딸 가족이 다녀갔다. 이박삼일 있다 보니 다른 때보다 여유가 있어서 딸은 서재에 있는 오래된 사진앨범들을 정리해 주겠다고 나섰다. 사십 년 이상 쌓인 사진의 부피와 무게는 엄청난 것이어서 서재 벽을 가득 채운 책장 위 공간의 반을 앨범이 차지하고 있었다. 비슷한 사진이 많아서 소장할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가차 없이 버렸다.
덕분에 종이 사진을 절반이나 내버렸다. 그 와중에 2010년도 다이어리 하나를 찾았는데 겉표지를 열어보니 책날개에 봉투 두 개와 작은 수첩에서 찢어낸 듯한 메모지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봉투 하나에는 1만 원 문화상품권 2장이 들어 있었는데 발행일자가 2009년이고 유효기간은 5년이었다. 아뿔싸! 당시 시세로 따지면 책 두 권이 날아간 셈이다.
다른 봉투에는 성은실 권사님 축의금이라고 쓰여 있었다. 2010년이면 내가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은 해다. 그해에 성권사님 아들이 결혼을 했는데 내가 가려고 했다가 못 간 것일까?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 추측이 맞았다. 권사님도 혹시나 하여 그때 적어놓은 축의금 목록을 확인해 보니 내 이름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권사님께 “제가 뒤늦은 부조를 할 테니 밥을 사세요” 했고 우리는 삼 년 만에 만나 회포를 풀었다.
메모지에는 시스엘르, 거성닷컴, 누리메디칼, 가발나라 등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항암 치료 후 가발을 사려고 적어놓은 연락처인 듯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맞춤 가발이 백만 원을 넘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저렴한 것을 여러 개 맞추었는데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서 모자를 쓰고 다녔던 것 같다. 그렇다. 이런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속표지에 일본어로 주소 하나가 쓰여 있었다. 이건 분명 둘째가 일본에 있을 때의 숙소 주소다. 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직장에 다니다 동경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다. 내가 병을 진단받았을 때 딸은 어학원을 수료하고 한 미용업체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다. 혼자 사는 것이 너무 외로워서 밤에는 단 것을 폭풍 흡입 한다던 딸이 간신히 적응해 가는 시기였다. 딸은 자기가 돌아오는 게 좋겠냐고 물었고 나는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네가 오는 것이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고. 대신 딸과 편지를 몇 번 주고받았는데, 진지함이라면 질색하는 딸도 편지로는 엄마에게 살가운 말을 많이 해주었었다.
2010년 다이어리 1월 일정표
페이지를 넘기니 월별 일정표가 있었다. 1월 19일에는 ‘초진’이라고 쓰여 있었고, 21일에는 ‘덱사메타손 복용 시작’이라고 쓰여 있었다. 23일에는 ‘C 신경정형외과 입원’, 26일에는 ‘서울성모병원 입원’, 2월 1일에는 ‘덱사메타손 주사제 시작’, 2월 6일에는 ‘퇴원’, 2월 16일에는 ‘외래 진료’, ‘뼈 주사’, ‘대전행’이라고 쓰여 있었고, 2월 17일에는 ‘덱사메타손 3차 투약 시작’이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뒤죽박죽 기억하고 있는 사실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맞다. 충남대학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다음 날 서울성모병원으로 갔지만 약 처방만 받고 내려왔다. 사흘 후 C 신경정형외과에 입원했다. 서울에서 처방받은 대로 덱사메타손을 한 번에 40알씩 하루 3번 먹었는데 약만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던 게 기억난다. 이 약은 스테로이드제라서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그곳에서 여러 지인들의 방문을 받았었다. 다니던 연구소 일을 인수인계하기 위해 후임자가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사흘 후에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했다고 되어 있는데 열이 났던 모양이다. 민교수가 열이 나면 지체 없이 응급실로 오라고 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