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발성골수종 진단을 받은 날로부터 14년이 흘렀다. 나는 언젠가는 내 투병생활을 담은 글을 쓰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않은 일들로 글쓰기는 계속 미루어졌다. 골수 이식 후 2년째부터 찾아온 우울증과 딸의 결혼식, 직업적 재기, 친정아버지의 치매 투병과 소천 등의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투병기를 쓰려는 의지는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나의 결심을 거의 잊어버릴 즈음에 당시에 쓴 일기장이 튀어나왔다.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인조 가죽 표지는 손만 닿아도 바스러졌다. 일기장이 다 부식하여 소멸하기 전에 글을 디지털 문서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전에 써두었던 토막글 몇 편이 있어서 이 글들과 일기 내용을 엮어서 투병기를 구성해 보기로 했다. 회상에 의지하여 썼던 글들에 일기가 디테일을 부여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일기는 1월 말부터 7월 초까지 6개월분이었다. 골수 이식을 위해 입원하기 전날까지 쓴 것이다. 무균실에는 책이나 노트를 가지고 갈 수 없었기에 글을 쓸 수 없었고, 이식 후 퇴원했을 때는 마약성 진통제에 취해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일기장 본문은 1월 16일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이 기록의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세 가지 항목이 쓰여 있었다.
첫째, 혹시나 내가 수년 내에 죽게 될 때 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을 막내를 위해 쓴다. 엄마의 체취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둘째, 남편과 큰딸, 둘째 딸, 양가 부모님, 형제들에게 나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서 쓴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을 그들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셋째, 다행히 병을 극복하고 건강을 되찾게 되었을 때 이 소중한 체험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 쓴다.
첫 페이지를 쓰고 14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난치병에 걸린 사람과 그 가족들에게 이 길을 먼저 걸어간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에서 한 줄이라도 참고할 것이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