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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May 24. 2024

전원 허락, 서울, 그리고 다시 집으로

    충남대학병원에서 받은 진단명은 다발성골수종 2기였다. 2라는 숫자가 크지도 작지도 않아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담당 교수는 이 병원에서도 치료할 수 있다는 정도로만 말했지, 더 적극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얼른 서울성모병원 의사에게 보이려면 최대한 빨리 전원하는 것이 필요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수요일 아침, 교회 소그룹 리더인 P 집사가 담당 교수를 만나기 위해 오전 8시부터 교수 연구실 앞에서 기다렸다. P 집사는 충대의대 출신 이비인후과의사다. 의료업에도 상도덕이 있는지라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데 최소한의 절차가 필요했고 예의를 갖추어 우리 의사를 표현할 필요도 있었다. P 집사는 자기 병원에 출근하기 전에 전원 허락을 받아주려고 와준 것이었다.      

    전원 허락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기가 무섭게 우리는 서류를 챙겨서 승용차에 올랐다. 지하 주차장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니 두 사람이 우산을 받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회 소그룹 멤버인 K 집사 부부였다. 내가 다발성골수종 확진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가기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 이른 아침에 나온 것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가 이 교회로 온 지 3년 정도 되었을 때였다.


    서울에 도착하니 친정 부모님이 와 계셔서 부모님과 함께 외래진료실에 들어갔다. 혈액종양내과의 민창기 교수는 피부가 창백할 정도로 희고 중키에 마른 편이었는데, 인상이 선했다. 우리는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기다렸다. 대전에서 가져온 검사결과지를 일별한 후에 그가 말했다. “완치를 목표로 해보지요”라고.

    완치라니! 인터넷에서 검색한 바에 따르면 혈액암에는 완치라는 개념이 없었다. 의사들이 절대 헛된 희망을 심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최악의 결과를 예고해 주어야 뒤탈이 없기에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나와 가족들은 속으로 “할렐루야”를 외쳤다. 엄마는 한술 더 떠서 M 교수 얼굴이 꼭 예수님 얼굴 같더라고 했다.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보고 싶은 것을 보는 선택적 지각일지라도 엄마 마음이 편하다면 다행한 일이었다.


    민교수는 치료과정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우선 덱사메타손이라는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한 후 암세포가 줄어들지 않으면 벨케이드 주사제를 맞는다고 했다. 덱사메타손 투여가 가장 전통적인 치료법이기 때문에 보험적용을 받으려면 이 약을 먼저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벨케이드 주사제로 암세포가 웬만큼 없어지면 자가골수이식을 한다고 했다. 자가골수이식이 성공적이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하면 타인 골수를 이식받아야 한다고 했다. 만일을 위해 가족들의 골수를 검사했더니 남동생의 골수가 가장 높은 일치율을 보여서 1차 이식 실패에 대한 대비책까지 마련되었다.                

덱사메타손을 한 번에 40알 씩, 하루 3번 먹어야 했다.

    민교수의 설명을 듣고 덱사메타손을 처방받아 다시 집으로 내려왔다. 당장 서울 병원에 입원해야 되는 줄 알고 있다가 대전으로 돌아오니 기분이 얼떨떨했다. 약을 정시에 정량 복용을 하는 것 외에 특별한 주의사항은 없었지만 37도 이상의 열이 나면 즉시 응급실로 오라고 했다.

    덱사는 한 번에 40알씩 하루  번 먹어야 했다. 약만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부작용이 더 문제였다. 식욕이 떨어지고 얼굴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집에는 어린아이가 있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 어려웠고 아이에게도 불안을 야기하는 것 같아서 전에 다니던 신경정형외과에 입원했다.    

일기 발췌_2010년 1월 20일(수)     

    확진받은 후 가장 먼저 염려된 것은 양가 부모님들이었다. 노인들을 어떻게 안심시킬까? 시부모님은 내가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얼굴을 봐야겠다고 밤에 기어이 병실로 오셨다. 그리고는 내가 여전히 명랑한 것을 보시고 이제 됐다, 하고 가셨다.
    새벽 2시에 잠이 깨어 펜을 들다 말고 지인들에게 기도와 응원을 요청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사람들의 관심과 격려 없이는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잠도 없는 선주 엄마가 문자를 받자마자 전화를 했다. 유방암 투병 중인 그녀는 현재까지 항암제 4차, 방사선 2차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요즘은 암이 흔한 병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킨다.
    어제 핵의학과에서 PET-CT를 찍은 후 계속 어지럼증이 있다. 검사하기 전에 맞은 주사제 때문인가 보다. 다발성골수종 안내 책자에 나왔던 의식장애, 사고장애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의식이 자꾸 흐려지고 휴대폰 주소록에 있는 사람들 이름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 인식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일기 발췌_2010년 1월 21일(목) 비

    오늘은 초조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담당 교수의 퇴원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는 일체의 의무기록을 받아 갈 수 없다는데 서울에 도착해야 하는 시각은 12시라 마음이 급했다. 비는 짓궂게 내리고... 꼭 오늘 올라가야 할까? 진료일을 연기하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남편은 하루라도 늦추지 말자고 했다.
    남편과 P 집사님이 담당 교수의 연구실 앞에 죽치고 기다려서 퇴원 허락을 받았다. 남편 친구 부인인 원무과 직원 W가 해당 검사실을 쫓아다니며 기록 복사를 재촉했다. K 집사님 부부는 출근했다 다시 나와서 우리 두 사람을 차까지 배웅해 주었다. 이들은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교도 강의도 아닌 몸으로, 눈빛으로 보여주었다.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에 대비하여 서울 사는 여동생과 친구 정민이에게 원무과 접수를 부탁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남편이 인맥을 동원하여 서울성모병원 간호사를 소개받았고 그녀의 도움으로 드디어 접수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가는 내내 전화통에 불이 났다. 나중에 큰딸이, 엄마 병보다 전화가 더 무섭더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진료가 끝나니 오후 2시였다. 부리나케 밥 한 그릇씩 먹고 2시 반에 예약된 골밀도 검사를 받으러 올라갔다. 당연히 오늘 입원할 거라 생각했기에 담당 교수를 바로 또 만날 줄 알고 빠트린 질문이 뒤늦게 생각났다.
    남편은 담당 교수에게 추가 질문을 하기 위해 3시에 시작하는 ‘다발성골수종의 치료’ 강의를 들으러 가고 딸과 나는 방배동 시누이댁으로 갔다. 입원하지 않고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되어 병이 다 나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카들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누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시누이댁으로 왔을 때 나는 몹시 피곤했으나 막내를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대전 집에 돌아왔고, 집에 와서는 푹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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