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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Oct 06. 2024

두려움이 몰려오다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다발성골수종 확진을 받은 후 일어난 일들은 내 이해의 속도보다 훨씬 빨리 진행되었다. 치료병원을 정하기 위한 논의, 서울성모병원으로의 이관, 또 한 번의 골수검사, 그리고 드디어 새로운 담당교수와의 만남.


    서울성모병원의 민창기교수는 핏기 없는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가 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최고의 병원에서 오랜 교수생활을 한 사람의 오만함은 없었다. 병에 대한 의사의 태도가 환자의 태도를 결정한다! 나는 두렵지 않았다. 이 사람이라면 훌륭한 지휘관이 되어 암과의 전투를 멋지게 치르도록 나를 도와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는 다발성골수종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위자였다.


    나는 늘 의존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지만 죽음의 두려움이 몰려오는 그 순간에는 나와 마음을 함께하는 존재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나의 가족이 마음을 같이 해주었지만 내편이라고 느껴지는 전문가가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든든함이었다. 다윗이 ‘내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썼을 때 그는 전문가보다 월등히 나은 존재인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었던 것 같다.


    충남대학병원에서 다발성골수종 진단을 받고 골수검사를 위해 하룻밤을 입원하고 있는데 한밤중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죽음의 과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걸까? 죽음의 순간에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실까? 나는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사람들 중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기도로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오늘 혈액암 진단을 받았고 지금 몹시 두렵다,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간단한 문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진심 어린 걱정을 해주고 기도를 약속하였다. 매일 기도하겠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겠다는 답장이 수십 개 왔다.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나의 두려움을 이해해 주고 나의 병을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로 충분히 안심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문을 보내주기도 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내 병의 의미에 대해 성찰할 수 있도록 좋은 글귀들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천군만마가 나를 두르고 있는 느낌이 이런 것이리라.    


    지인들의 기도 약속을 받고 나니 두려움은 씻은 듯 사라졌고 민창기 교수를 만나고 나니 용감한 전사처럼 전투에 임할 준비가 되었다. 전투의 첫 단계는 덱사메타손 복용이었다. 이 약은 스테로이드제인데 한 번에 40알씩 하루 세 번 먹는 것이었다. 부작용으로 고열이 나서 응급실에 몇 번 실려 갔고 20일 동안 입원을 하기도 했다. 그다음 순서로 벨케이드 주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덱사메타손은 가장 전통적인 치료법인데 먼저 그것을 사용해 보고 효과가 없을 때 벨케이드를 써야 보험적용이 되었다.

    12번의 벨케이드 주사가 끝나고 관해(혈액에서 암세포가 검출되지 않는 상태)가 되면 자가골수이식을 받을 수 있었다. 관해가 안 되면 벨케이드를 4번 더 맞는다. 그래도 안 되면 관해가 될 때까지 맞는다. 다행히 나는 12번 만에 관해가 되었다. 그다음 과정은 골수이식 전 단계로 멜팔란 주사를 맞는 것이다. 이번 약은 벨케이드보다 확실히 더 강력한 것으로 이 주사를 맞으니 머리카락이 점점 빠졌다. 그다음은 골수 채취였다. 등짝에다 드릴로 구멍을 뚫고 주사기로 골수를 빼낸다. 골수 채취는 하도 여러 번 해서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이렇게 채취한 골수를 기계장치에서 고속 회전시키면 조혈모세포가 분리되어 나온다. 이것이 나의 피를 다시 맑게 해 줄 생명수이다.

일기 발췌_2010년 1월 22일(금)
    덱사메타손 복용을 시작했다. 민창기 교수가 말한 대로 조금 기운이 없는 건 맞는데 가슴 통증은 딸꾹질하는 수준보다는 훨씬 심했다. 처음 40알을 먹을 땐 약 성분이 장기를 지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에 약기운이 퍼지는 것 같았다. 이 약이 불필요한 항체, 즉 암세포를 파괴하는 것일 터이다. 의사가 말한 대로 중쇄와 경쇄를 분해시키기 시작한 것일까? 가슴이 아픈 이유는 손상된 갈비뼈의 골수 속에 암세포가 가장 많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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