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트레비네
인간의 마음이 이다지도 간사했던가! 한국에서 여행을 준비할 때는 여행을 하는 모든 순간들이 새롭고 즐거울 것 같았는데, 5개월 차가 되니 여행도 슬슬 싫증 나기 시작했다.
짐을 싸고 풀고, 배낭을 짊어지고 걷고, 귀중품을 도난당할까 봐 마음을 졸이는 순간들이 일상이 되자 안정적인 삶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여행은 무의미할 것 같아 우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잠시 머물기로 했다.
어떠한 이유로 선택했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세계 1차 대전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 발생한 나라이자 90년대 내전으로 그 슬픔의 흔적들이 아직 남아있는 곳이기에 꼭 방문하고 싶었다는 거창한 이유를 댈 수 있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사실은 머물고 있는 스위스에서 나름 가깝고 물가가 저렴해 선택한 이유가 더 크지만...
처음 가는 장소는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첫인상이 존재한다. 날씨, 주변의 풍경, 현지인의 친절함 등 여러 가지에 따라 첫인상이 결정된다. 하지만 그것 과는 별개로 기운으로 느껴지는 첫인상이 있는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의 첫인상은 삭막함이었다. 며칠을 머무는 동안에도 좀처럼 정이 들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트레비네라는 작은 도시로 이동했다.
렌트한 아파트 덕분에 당분간 배낭을 싸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밤늦도록 거실에서 TV를 볼 수 있다는 점이 행복했다. 무엇보다 냉장고에 음식을 넣어놔도 없어지지 않는 게 정말 좋았다. 호스텔에 머물던 그때는 우리의 이름을 써놓아도 음식이 자주 사라졌다.
아침에 시리얼과 함께 먹으려고 넣어 놨던 우유가 사라진 어느 날은 범인 색출을 위해 호스텔 스탭에게 CCTV를 돌려달라는 말까지 하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차오른 적도 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제자리에 있는 우유와 주스를 보며 흐뭇해하다니 실로 어이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냉장고는 나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였다. 어른일 때는 온갖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 돌아오면 냉장고 안에 있는 시원한 캔맥주에 위로를 받았고, 어린이일 때는 냉장고 속 간식이 작은 선물이 되어 나를 기쁘게 해 주었다.
내가 국딩이었던 그 시절 우리 집 냉장고 문짝에는 흰 우유와 오렌지 주스가 항상 있었다. 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팠던 지라 흰 우유보다는 오렌지 주스를 선택했는데, 어느 날 오렌지 주스가 지겨워 엄마에게 포도주스를 먹자 했지만 설탕이 많다는 이유로 단칼에 거절당했던 적이 있다. 그때 무거운 오렌지 주스 유리병에는 무가당이라는 글자가 크게 붙어져 있었다.
취향이 소나무인 엄마는 항상 같은 브랜드의 같은 상품만 고집했다. 수많은 우유 브랜드 중에선 서울우유를, 오렌지 주스계의 양대 산맥이었던 훼미리 주스와 델몬트 주스 중에선 훼미리 주스를 선택했다. 초코우유도, 딸기우유도, 포도주스도 우리 집에선 목격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때의 오렌지 훼미리 주스 덕분에 나는 오렌지 주스를 선호하지 않는다. 마치, 어린 시절의 충족되지 못한 다양함에 대하여 한이라도 풀 듯 새로운 주스에 도전하는 걸 좋아한다.
때론 당혹스러운 맛에 한 입 먹고 버릴 때도 있지만 새로운 맛에 도전할 때 그 두근거림이 좋아 포기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