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5. 성 장 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장 중이다.

by 미리암


2014년 두 번째 엄마가 되는 기회가 되었다.

13년 만에 둘째 소식은 임신테스트기를 통해 확인했다.

외동딸에게도 너무 좋은 소식이다.

차이가 있지만 형제는 어려운 때를 위해 있는 것이란 문구처럼 반가운 소식이었다.


산부인과를 다녀왔다.

작은 생명체가 보였다. 신기했다.

첫아이 출산 후 100일 동안 무서움에 신생아 딸

만지기 두려워 한적 있다.

그때 매일 바라기 했던 말 '100 일만 빨리 지나다오'

내가 했던 것은 목욕 빼고 그 외 모유수유 등

아기는 남편과 동생의 도움으로 100 일을 맞이했다.

그때부터는 목을 가눌 수 있기에 조금 더 아이와의 접촉이 수월해졌다.

어설픈 엄마역할 수행 중인 13년 만에 다시

아기소식을 맞이한 것이다.


이번에는 미리 잠재의식으로 아기가 태어나면

목욕시킬 때 어떻게 할 것인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이제 10 살 딸에게도 설명해 줬다

시골은 토지가 많으나 적으나 매일 꾸준한 일들이 있다.


2014년 그해는

참깨를 심었는데 시골 귀농한 사람 중 아내와 딸까지

내려온 사람은 우리 집뿐이었다.

그래서 좋든 싫든 꾸준히 해내고 있어야 했다.

참깨는 어느덧 알곡이 차고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낫질을 하며 참깨를 베어내었다.

물론 혼자 하지는 않았다.

남편은 기계수리로 인해 바빴다.

낮 더위를 피해 딸이 스쿨버스를 타면 일은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남편 선배인 옛날 리더와 함께 참깨 수확작업을 한다


"우리 와이프가 산모한테 참깨 수확작업을 시키냐고 그러네.. "

그리고 껄껄껄 웃는다.

"어쩔 수 없죠. 사람이 없는데... "


그렇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몸이 으슬 으슬 춥기 시작했다. 한참을 자고 나니

컨디션은 좋아졌다.

대전에 딸의 마인드맵 교육이 있어서 주말에 다녀올 수 있었다.


4개월이 되는 7월의 어느 날

남편은 기계부속을 위해 광주를 가야 했고

난 정기검진을 받으러 가야 했다.

다행히도 (구) 리더가 병원이동을 도와주기로 했다

이번에 동생의 심장박동 소리를 듣기 위해

딸도 동행을 했다


진료접수를 했다.

대기자들이 정말 많았다. 순번차례가 되어 딸과 함께

진료를 받으러 갔다.

초음파로 아기의 상황을 보고 있었다.

근데 심장 뛰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다.

점점긴장이 되는 찰나의 순간


" 산모. 아기가 숨을 쉬지 않네요. 좀 오래된 거

같네요.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


" 음. 참깨 수확작업하고 오한이 들어 살짝

아팠습니다. "


" 병원에 입원하셔서 아기를 유도분만으로

출산해야 됩니다. "


얼굴은 굳어지고 머릿속은 백지가 되는 그 순간

딸이 목격한 그 상황을 수습해 줄 수 있게 챙기지 못했다.

남편과 통화 후 입원수속을 밟았다

딸의 담임선생님에게도 전화를 드려 상황을 설명했다.


처음 사산아 장례를 경험했다

임신 14개월 이상의 태아가 사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병원에 2박 3일 입원하면서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입원하는 동안 마을 어르신들은

내가 다하지 못한 참깨 수확을 마무리 지어주셨다며

전화를 하신다.

퇴원해서 집에 오던 날

친정엄마처럼 간식을 챙겨 오시고

10 쌀 딸에게 밥 짓는 것도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10 년동안 불임으로 인공수정하던 친구의

간절한 사연 속에 내가 했어야 했던 것은


" 앞으로 더 잘 될 거야 " 보다

" 그랬구나 " 들어주는 시간으로 채웠더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사연들로 세월은 채워져 가고

같이 협력하는 사람들 가족들도 모두 내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10 년이 흘렀다.

참깨밭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임신 중 참깨를 수확하며 보냈던 나는

국내외 유통공로 표창장을 받기고 하고, 누군가에게 기운을 실어주기 위해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결국 이 시간을 마주했다.


껄껄껄 웃으며 일을 했던 또 한 사람은

2020년 어느 날 밤 짐을 싸서 온 가족이 사라졌다.






keyword
이전 04화4. 날 벼 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