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
고등학교 시절, 이상의 소설 <날개>를 좋아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면 마음이 간질거렸다. 소설의 줄거리와는 하등 상관없었다. 겨드랑이가 가렵다는 주인공에게 완전히 이입되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정말 내 겨드랑이에도 날개가 돋는 것 같았다. 그 문장은 그 시절 나를 꿈꾸게 하는, 내가 갖고 싶은 문장이 되었다.
훗날, 내가 이 문장을 가지는 방식은 자기소개였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부터 취업을 위한 광고교육원 자기소개까지, 나는 나를 드러내야 할 때면 늘 이 문장을 입에 올렸다. 물론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라 손을 쫙 펼쳐 보인다거나, 겨드랑이를 긁는 식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저는 요즘 겨드랑이가 간지럽습니다. 제 겨드랑이에서 언젠가 돋아날 날개 때문입니다. 세상을 날아보고 싶습니다."
순한 여학생의 얼굴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오면,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머물렀다. 그런 말을 내뱉고 나면 진짜 날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술 먹고 전봇대에 오른다거나, 2층에서 뛰어내린다거나 하는 무모한 도전은 하지 않았다.
새벽 5시, 기지개를 켰는데, 담이 걸린 중년의 어깨
며칠 전, 오전 6시에 기상하던 내가 5시에 눈이 떠지는 불상사가 생겼다. 중년의 몸인 나에게 아침 한 시간의 단잠은 보약 한 봉지와도 바꾸지 않을 하루치 에너지였다. 다시 잠들기에는 애매한 시간, 어쩔 수 없이 머리맡에 놓인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잠과 함께 잠시 멈췄던 세상에 시동을 걸었다. 네이버 뉴스를 훑고, 인스타그램 '좋아요'를 확인하고, 브런치 이웃 작가들의 글을 읽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아! 슬슬 아침 준비를 해야겠다.'
80도쯤 돌아누운 자세를 비틀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0.5초 후, '아'는 소리는 '악'이 되어버렸다. 통점을 정확히 겨냥한 무언가가 내 통감각을 단번에 마비시켰다. 담이 걸린 것이다. 오른쪽 어깻죽지 부근이, 어제 먹다 남긴 치킨 날개가 입속에서 와작와작 씹히는 느낌이었다.
숨이 멎을 만큼, 너무 아팠다. 조금 있으면 사라질 줄 알았던 통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또렷해졌다. 숨을 깊게 들이쉴 때마다 쿡, 하고 찔렀다. 겨우 기지개 하나 켰을 뿐인데 담이라니. 억울했다.
사실 담에 걸린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나만 겪는 일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다 겪는다. 의학적 용어로는 근막통증증후군이라 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담이 잘 걸리는 것도 일종의 노화의 증거라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근육의 탄력은 줄고, 관절은 경직되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그렇게 날개가 돋을 거라 믿고 있던 내 겨드랑이는, 날갯죽지는, 그리고 등 전체는 이제 조금만 뒤틀려도 담이 걸리는 걱정거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날고 싶은 중년, <삶은 도서관>으로 세상에 날개를 펼치다.
2025년은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해였다. <삶은 도서관>이라는 첫 산문집을 출간한 해였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대학 시절 중 권위 있는 시 전문 잡지로 등단했었다. 계속 열심히 썼다면 첫 산문집이 아니라 책을 열 권은 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게으르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성실한 직장인으로 살았다. 게다가 시부모 봉양에도 최선을 다했다. 누군가의 아내로서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다만, 더는 내 겨드랑이가 간지럽지 않았다. 언제부터 내 겨드랑이가 간지럽지 않았을까. 날고 싶다는 꿈마저 잊고 살았던 걸까.
스무 살에 간지럽던 겨드랑이는 서른이 되면 날개가 되어 돋아날 줄 알았고, 마흔이 되면 훨훨 날아다닐 줄 알았으며, 쉰 무렵에는 알프스 산쯤은 가볍게 날아갈 줄 알았다. 나만 날 거라는 상상은 하지 많았다. 나와 같은 시대를 열심히 살던 친구들 역시 다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우리는 각자의 날개를 잠시 접어두고 있을 뿐, 언젠가는 다시 펼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현실은 이상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그때의 간질거리던 날개를 제대로 펴고 사는 친구들을 찾기란, 물에 젖은 종이비행기가 다시 날아오르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다.
오십이 넘어서야 글을 쓰는 삶에 다시 도전했다. 기지개를 다시 켰다. 운도 좋았다. 공모전에 당선되고, 책까지 출간하게 되었다. 올해 8월부터는 오마이뉴스에도 글을 송고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꿈이 기자였으니, 어쨌든 시민기자가 된 것도 오래 미뤄두었던 꿈의 한 갈래를 다시 붙잡은 셈이다.
나이에 먹히지 않겠다는 결심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글의 근육량은 사유량과 비례한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문장 근육은 쉽게 굳고, 조금만 무리해도 삐그덕 소리를 낸다. 경직되어 있던 사유를 억지로 움직이다 보면, 담이 걸리듯 어떤 문장은, 어떤 단락은 미세한 파열을 남긴다. 시를 썼던 젊은 시절, 말랑말랑했던 감성은 경직되고 뻣뻣해졌다.
그때의 감성은 소주 한 병, 와인 한 잔, 옛날 비엔나 커피를 마셔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년의 글쓰기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중년의 깊고 다정한 감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즘 이어령 선생님의 어록집 <말>을 읽고 있다. 모든 문장이 보석처럼 빛났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내 눈에 반짝이는 문장이 있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시간 속에 먹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시간을 적극적으로 내 생명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일이다. 그것이 슬픔이든 고통이든 늙음이든 한 사발의 떡국처럼 먹어버릴 때, 이미 그것은 내 신선한 혈관 속의 한 핏방울이 된다. - <이어령의 말> 57쪽
안도감이 들었다. 적어도 나는 나이에 먹혀 들어가지는 않았구나 하는 위로가, 중년이 된 내 마음을 어루만졌다. 나이에 먹힐 뻔했던 내 삶을 붙잡아준 건,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는 문장이 지워지지 않고 마음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쓴 <삶은 도서관>을 읽고 나니 자신도 무언가를 다시 해보고 싶어 졌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내가 펼친 날개가, 자신의 날개를 잊고 살던 누군가의 겨드랑이를 간질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책을 내고 나서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바로 그런 고백을 들을 때였다.
물론 좋은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출간 한 달이 지나자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쏟아지는 신간들 사이에서 관심은 서서히 가라앉고 처음의 반짝임은 어김없이 옅어진다. 출간한 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지나가는, 우울한 시기가 나에게도 찾아왔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다. 겨우 돋기 시작한 날개를 이대로 접을 수는 없다. 스무 살 때처럼 알프스까지 날아가겠다는 욕망은 내려놓기로 한다. 나이를 인정한다. 그러니 모처럼 켠 날갯죽지에 담이 걸려도 괜찮다.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면 된다. 날개는 속도가 아니라, 다시 펼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존재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 이상의 <날개> 중에서
스무 살에 나를 움직였던 그 문장이, 중년의 나를 기어코 일으켜 세운다. 이 문장을 아직 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금의 나는 충분히 잘 살아가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실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