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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때로는 식어가는 땅콩의 소리를 듣는 것

by 포도송이 x 인자

막 밭에서 캐낸 땅콩을 큰딸이 나눔으로 받아왔다. 속이 꽉 차지 않은 겉껍질들을 벗겨내니, 한 줌이 될까 말까였다. 늘 볶아놓은 땅콩만 보다가 생땅콩을 보니 괜히 낯설었다.


누군가 한 명은 저 생땅콩을 볶아야 할 터. 며칠째 방치된 땅콩을 결국 내가 볶기로 했다. 한 손으로는 새로 재미 붙은 인스타 팔로잉을 늘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무주걱을 휘저었다. 인덕션 온도를 7로 할까 하다 너무 셀까 싶어 6으로 낮췄다. 땅콩이 볶아지는 소리는 제법 요란했다.


탁— 타타타타 탁탁.

조금만 방심하면 금세 까맣게 타버릴 것 같은 저항, 자기를 좀 더 봐달라는 아우성이었다. 결국 인스타를 껐다. 어느 누구의 릴스도 더는 들어오지 않았다. 뜨겁게 볶아지는 땅콩이 이겼다. 나만 봐달라고 외쳤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드디어 땅콩이 볶아지면서 고소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붉그스름하던 속껍질의 채도는 낮아지고, 몇 알은 살갗이 검게 그을렸다. 15분쯤 지났을까. 알맞게 볶아졌는지 확인하려고 부서진 알갱이를 먹어보니 고소했다 불을 끄고 담아보니, 작은 접시 한가득. 겨우 땅콩을 볶았다는 책임을 완수하고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책을 출간하고 나니,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하루가 분주했다. 정확히 말하면 손가락이 분주했다. 알라딘, 교보, 예스 24를 들락날락하며 순위와 평점, 세일즈포인트에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타이르면서도 자꾸 일희일비하는 나 자신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때였다.

‘지직지직… 타닥타닥….’

어디서 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혹시 인덕션을 켜뒀나 싶어 겁이 났다. 다행히 아니었다. 아니면 새로운 이명이 들린 걸까 싶어 귀를 막았다. 그것도 아니었다. 소리를 따라가니 식어가는 땅콩 접시 앞에서 나는 소리였다.


‘찌지직…지직지직.’

식어가는 땅콩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들... 이상하게, 그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소리가 땅콩의 절규, 어쩌면 세상을 향한 외침처럼 들렸다. 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 왼쪽 귀를 가만히 갖다 대었다.


저 아직도 뜨거워요.
제 살을 제가 벗겨내고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세상에 나가고 싶어요.


글을 쓰는 일도, 책을 출간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25년 동안 껍질 속에 갇혀 있던 내 마음이 때로는 뜨겁게 볶아지기도 했지만. 식어갈 때도 있었다. 식어가는 시간이라고 해서 조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뜨거울 때는 몰랐던 내 안의 작은 균열들이 오히려 뜨거운 숨을 쉬기도 했다. 안쪽에서 천천히 익어가던 내밀한 시간들이 아우성치기도 했다.


식어가는 땅콩, 그래, 너도 세상에 나오고 싶구나.

아니, 너는 어쩌면 식어가는 것이 아니라, 더 고소하게 익어가는 거구나

땅콩에서 나는 그 희미한 소리에, 익어가는 것들의 작은 울음을

나는 좀 더 오래 담아두고 싶었다.

그 소리가 다 멈춘 후에야 땅콩 한 알을 집어 들었다.

볶은 땅콩이 아주 고소했다.
이제야 제맛을 찾은 나의 글들도 부디, 저렇게 고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가님들,『삶은 도서관』이 12일 본격 판매를 시작했고,
이틀 만에 2쇄를 찍게 되었습니다.

브런치 이웃분들의 뜨거운 성원 덕분입니다.
바쁜 와중에도 브런치와 오마이뉴스, 인스타 곳곳에서
제 책을 소개해 주시고, 따뜻한 서평을 남겨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써주실 (!) 작가님들도요.

고맙습니다.
저도 계속 익어가겠습니다.


https://brunch.co.kr/@cherryn99/229

https://brunch.co.kr/@fe03f174a72341b/149

https://brunch.co.kr/@eb50c38bb9b3439/282

https://brunch.co.kr/@ce3179a175d043c/943

https://brunch.co.kr/@thatchild/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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