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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송이 Jul 09. 2024

우리가 함께 친 밑줄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함께 읽습니다.

저는 웬만해선 대출을 권하는 입니다. 도서관 책을 대출해서 읽는 것이 사서 읽는 것보다 장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단점도 있습니다. 바로 책에 밑줄을 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으나, 제1 금융권에서 대출받는 것이 이율은 싸서 좋지만,  대출 자격은 너무 높고 대출 한도가 너무 낮다는 이치와 비슷합니다. 독서를 천천히 음미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좋은 문장에 밑줄 하나도 마음대로 그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도서관 다니는 사람들도 좋은 책들은 사서 읽습니다. 사서 고, 또 나눠 읽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도서관 동료들과 만든 독서하는 사조직이 있습니다. 어찌나 책을 좋아하는지, 회사에서도 보고 집에서도 또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중 한 명은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책이 아픈 건 절대 보지 못합니다. 조금만 찢어지거나 낱장분리 기미가 보이면, 매일 수선하고 수선용 가위를 들고 홀로 수술실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를 책들의 수선사, 혹은 책들의 외과의사라고 칭합니다.


어쨌거나, 저의 독서모임은 다른 독서모임과 마찬가지로 좋은 책을 읽고, 이야기합니다. 일주일 전부터 색다른 방법의 독서를 시도했습니다. 좋은 책을 순서를 정해 돌려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 것이죠. 저는 맨 뒷번호를 받았습니다. 마지막에 읽는 재미가 진짜 솔솔 합니다. 넷이 함께 그은 밑줄을 제일 먼저 볼 수 있기 때문이죠. 나만 친 문장을 볼 때면 이상한 문장 소유욕도 생깁니다. 계조직으로 치면 마지막 곗돈을 타는 사람의 이율이 더 높은 것과 같습니다.


이번주에 우리가 함께 읽은 책은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입니다. 줄거리는 무심하고 거친 아버지와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한 채 아이들 돌보는데 지친 어머니가 주인공 소녀를 여름 몇 달 동안 친척 집에 맡긴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소녀는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받지 못한 보살핌과 애정을 친척집에 맡겨진 몇 달 동안 받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며 이별합니다. 책을 읽는 동안 클레어 키건의 아름다운 비유와 표현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주인공이 느낀 감정들을 함께 느끼면서  말을 아끼고 삼키게 됩니다.  오래간만에 정말 아름다운 중편 소설을 읽었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니 영화도 곧 볼 예정입니다.


클레어 키건의 주옥같은 문장에 비하면 우리 4명이 함께 친 문장들은 너무 적다고 느껴집니다. 모든 문장이 너무 좋아서 너무 많이 치면 책이 온통 밑줄로 가득 찰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많이 아꼈습니다. 전체적인 서사를 놓치지 않으면서 문장에 집중하는 시간이 참 좋더군요. 왜 밑줄 독서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한 권의 책을 함께 밑줄을 쳐서 읽으니 같은 집에 살아온 자매처럼 더 돈독해졌습니다. 당분간 우리는 함께 밑줄을 긋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친 문장들을 공유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는 볼펜이 아니라 심장을 쥐고 밑줄을 긋는 줄 알았습니다.


연필, 주황색 헝광펜,초록색 볼펜, 하늘색 색연필로 그은 우리가 함께 한 밑줄

p. 30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p.31 나는 이런 기분을 또 언제 느꼈었는지 기억하려 애쓰지만 그랬던 때가 생각나지 않아서 슬프기도 하고, 기억할 수 없어 행복하기도 하다.


p.70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p.75  바로 그때 아저씨가 두 팔로 나를 감싸더니 내가 아저씨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는다.


p.79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불을 빤히 보면서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 떠오른다.


p.96 심장이 가슴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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