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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별 Apr 04. 2024

조용히 손절하는 중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조금씩 바뀌거나 성장해 나가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일을 계기로 인생을 보는 시각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인생이 있다. 겪게 되는 사건이나 에피소드, 그 시점은 각자 다르겠지만 아무리 순탄한 인생일지라도 파도타기를 해야 하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크고 작은 파도를 타다 보면 언젠가는 고요한 바다의 평화로움을 누릴 수 있는 날도 오겠지.


2년 전, 아주 파도를 만났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왔다. (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의지로 넘은 것이 아니라  파도가 마구 후려치고 넘겨버려서 지금의 세계로 데려다 놓았달까. 처음 와보는 낯선 세계에서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다가 점점 이 세계에 적응하게 되면서, 예전과 달라진 나를 보게 됐다.


한마디로 딱 잡아서 설명할 순 없지만,

나는 달라졌다.

그리고 달라지고 있다.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달라진 나의 모습 (주로 내면) 이 그리 싫지 않다. 거대한 파도가 가져온 후폭풍은 한동안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쓸데없는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오롯이 '내'가 남게 되었다.


중요한 건, 오직 나였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나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것만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결국 '나'에 대한 집중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책임지고 위로할 수 있는 건, 스스로 뿐이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마치 카메라 렌즈에서 피사체의 모든 배경이 날아가고 나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는 것처럼 뚜렷했다. 그러고 나니 내가 싫어하는 것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더 이상 시간이나 노력,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중요했지만, 지금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그 모든 것들과 조용한 손절이 시작됐다. 가장 큰 변화는 인간관계였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스트레스 요인을 줄이되 가치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집중하는 삶으로 루틴을 바꿔갔기 때문이다. 무조건 배가 고프거나 먹고 싶은 게 생기면 아무거나 먹는 식습관을 버리고, 하루에 한 끼라도 건강한 식단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고, 가급적 12시간 내지 16시간 간헐적 단식을 지키려고 하고 있다. 덕분에 작년 초 인생 최고 몸무게를 찍은 이후, 1년이 채 되지 않아  다시 이전의 몸무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이어트에 성공하자 스스로의 몸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예전에는 요가를 하는 스케줄과 친구의 약속이 생기면, 요가를 미루는 걸 택했지만, 이제는 요가부터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일주일에 3번, 오전 요가는 나와의 약속이기도 하다. 3월부터는 오전에 1시간씩 영어공부도 하고 있다.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오전 루틴을 바꿨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일주일 단위로 보면, 대본, 자막, 아이템 기획안 등 일하는 요일을 구체적으로 정해두고( 마감 기한보다 이른 요일로 정해둔다.) 그날에는 무조건 그 일을 끝내려고 한다. 나머지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생활에 루틴이 잡히니 비는 시간이 두렵지 않다. 쓸데없는 약속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될 사람들까지 챙기느라, 시간이며 돈이며 무지하게 소비했던 것 같은데, 결국 내가 정말 힘들 때 그 사람들은 없더라는 것이다. 정작 내가 동굴 속에 있을 때는 그 많던 친구들과 지인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위로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게 부질없다고 느껴졌다. (물론 도움을 준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찍 결혼한 친구들의 스케줄에 맞춰 그 동네에 찾아가서 밥 먹고, 육아 이야기 들어주고 시간과 돈을 써댔지만, 내가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의지가 되어주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그렇게 점점 소원해지던 관계들이 이제 와서 나의 소식을 궁금해한다. 몇 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았는데, 내가 전화번호를 바꿔버리고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자, 난리가 났다. 동창들 사이에서 무슨 소문이 돌았는지, 친구의 친구에게로 내 연락처를 수소문하고, 우리 가족한테까지 연락을 해서 나를 걱정한다. (걱정일까, 궁금증일까.)


이제 와서 소식을 전하고 연락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일을 계기로 앞으로 얼마나 굳건한 관계가 될 수 있을지 1도 기대가 없는데.


이 관계들을 굳이 이어나갈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


이제 와서? 도대체, 왜?


만나면 즐겁지 않고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관계 역시 피하려고 한다. 이제는 만나면 반갑고 스스럼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있는 관계에 시간을 쏟고, 정성을 쏟고 싶다.


시간은 유한하다. 내가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대상은 수시로 바뀌고,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 시간 속에서 내가 나를 지켜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는 많은 것들과 조용하게 손절을 하는 중이다. (그러니, 각자 가던 길 가자. 나는 잘 살고 있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완벽함은 더는 추가할 게 없는 상태가 아니다.

완벽함은 더는 제거할 게 없는 상태다.


군더더기가 제거되고 중요한 것만 딱 남은 상태.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복잡하지만, 심플하다.


많은 것들을 떨구고 진짜를 거둔,

나의 심플한 인생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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