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도 모르는 새 조금씩 바뀌거나 성장해 나가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일을 계기로 인생을 보는 시각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인생이 있다. 겪게 되는 사건이나 에피소드, 그 시점은 각자 다르겠지만 아무리 순탄한 인생일지라도 파도타기를 해야 하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크고 작은 파도를 타다 보면 언젠가는 고요한 바다의 평화로움을 누릴 수 있는 날도 오겠지.
2년 전, 아주 큰 파도를 만났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왔다. (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의지로 넘은 것이 아니라 파도가 마구 후려치고 넘겨버려서 지금의 세계로 데려다 놓았달까. 처음 와보는 낯선 세계에서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다가 점점 이 세계에 적응하게 되면서, 예전과 달라진 나를 보게 됐다.
한마디로 딱 잡아서 설명할 순 없지만,
나는 달라졌다.
그리고 달라지고 있다.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달라진 나의 모습 (주로 내면) 이 그리 싫지 않다. 거대한 파도가 가져온 후폭풍은 한동안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쓸데없는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오롯이 '내'가 남게 되었다.
중요한 건, 오직 나였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나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것만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결국 '나'에 대한 집중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책임지고 위로할 수 있는 건, 스스로 뿐이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마치 카메라 렌즈에서 피사체의 모든 배경이 날아가고 나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는 것처럼 뚜렷했다. 그러고 나니 내가 싫어하는 것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더 이상 시간이나 노력,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중요했지만, 지금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그 모든 것들과 조용한 손절이 시작됐다. 가장 큰 변화는 인간관계였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스트레스 요인을 줄이되 가치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집중하는 삶으로 루틴을 바꿔갔기 때문이다. 무조건 배가 고프거나 먹고 싶은 게 생기면 아무거나 먹는 식습관을 버리고, 하루에 한 끼라도 건강한 식단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고, 가급적 12시간 내지 16시간 간헐적 단식을 지키려고 하고 있다. 덕분에 작년 초 인생 최고 몸무게를 찍은 이후, 1년이 채 되지 않아 다시 이전의 몸무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이어트에 성공하자 스스로의 몸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예전에는 요가를 하는 스케줄과 친구의 약속이 생기면, 요가를 미루는 걸 택했지만, 이제는 요가부터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일주일에 3번, 오전 요가는 나와의 약속이기도 하다. 3월부터는 오전에 1시간씩 영어공부도 하고 있다.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오전 루틴을 바꿨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일주일 단위로 보면, 대본, 자막, 아이템 기획안 등 일하는 요일을 구체적으로 정해두고( 마감 기한보다 이른 요일로 정해둔다.) 그날에는 무조건 그 일을 끝내려고 한다. 나머지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생활에 루틴이 잡히니 비는 시간이 두렵지 않다. 쓸데없는 약속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될 사람들까지 챙기느라, 시간이며 돈이며 무지하게 소비했던 것 같은데, 결국 내가 정말 힘들 때 그 사람들은 없더라는 것이다. 정작 내가 동굴 속에 있을 때는 그 많던 친구들과 지인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위로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게 부질없다고 느껴졌다. (물론 도움을 준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찍 결혼한 친구들의 스케줄에 맞춰 그 동네에 찾아가서 밥 먹고, 육아 이야기 들어주고 시간과 돈을 써댔지만, 내가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의지가 되어주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그렇게 점점 소원해지던 관계들이 이제 와서 나의 소식을 궁금해한다. 몇 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았는데, 내가 전화번호를 바꿔버리고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자, 난리가 났다. 동창들 사이에서 무슨 소문이 돌았는지, 친구의 친구에게로 내 연락처를 수소문하고, 우리 가족한테까지 연락을 해서 나를 걱정한다. (걱정일까, 궁금증일까.)
이제 와서 소식을 전하고 연락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일을 계기로 앞으로 얼마나 굳건한 관계가 될 수 있을지 1도 기대가 없는데.
이 관계들을 굳이 이어나갈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
이제 와서? 도대체, 왜?
만나면 즐겁지 않고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관계 역시 피하려고 한다. 이제는 만나면 반갑고 스스럼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관계에 시간을 쏟고, 더 정성을 쏟고 싶다.
시간은 유한하다. 내가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대상은 수시로 바뀌고,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 시간 속에서 내가 나를 지켜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는 많은 것들과 조용하게 손절을 하는 중이다. (그러니, 각자 가던 길 가자. 나는 잘 살고 있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완벽함은 더는 추가할 게 없는 상태가 아니다.
완벽함은 더는 제거할 게 없는 상태다.
군더더기가 제거되고 중요한 것만 딱 남은 상태.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복잡하지만, 심플하다.
많은 것들을 떨구고 진짜를 거둔,
나의 심플한 인생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