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시멀 리스트는 못 되는 남편, 미니멀리스트는 못 되는 아내의 살림살이
나는 그저 청렴한 자산관리가
우리는 다행히도 둘 다 일을 하고 있는데, 우리 둘의 수입에 대한 관리는 내가 하고 있다. 일 년 좀 넘게 우리 둘을 객관적으로 지켜본 결과 돈 관리는 내가 하는 게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남편이 과소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돈의 흐름과 관리에 대해 내가 더 관심이 크다고 느꼈다.
나도 재테크 같은 것은 영 관심도 소질도 없어서 지금 하는 거라곤 통장을 목적별로 쪼개고 대출금이라던가 생활비 그리고 저축(적금) 같은 것을 계획하고 각 소비 항목별로 들어갈 예산 짜는 것이 전부이다.
워낙에 계획은 열심히 하고 재미있어하는 성격이라 스트레스는 없는 편이다. 계획을 마치고 나서 곧이어 나의 계획에 대해 남편에게 브리핑을 했고 이에 남편도 나의 의견을 따랐다. 다만 초반에 남편이 본인이 컨트롤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낌새가 몇 차례 있긴 했다. 나 같아도 내가 번 돈을 남이 관리하고 쓰고자 하는 때에 맘대로 못쓴다 했으면 그랬을 것 같다.
남편이 결국 용돈 인상을 요청해 조정을 하긴 했지만, 이제는 돈 관리는 나에게 온전히 맡기고 그저 공동으로 생활하는 생활비가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보기만 한다.(온라인 뱅킹에 친구 추가 시 '계좌조회'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각자 용돈도 있기 때문에 비상금을 만들 필요가 없고, 남편이 모든 걸 솔직하게 오픈하는 청렴한 사람이라 나는 자의적/타의적으로 우리 집의 청렴한 자산관리가가 되었다.
근데 한 사람이 가계를 담당하는 모습이 흔한 케이스는 아닌 것 같다. 시대가 많이 변한 만큼 내가 아는 국제커플들 또는 한국 커플들도 각자 다른 방식으로 가계 운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 자산 관리하는 커플들
나의 밴쿠버 생활 룸메이트였던 10살 많았던 언니는 언니 나이 40대 초에 2살 연상 영국인 형부와 결혼을 했다. 근데 언니가 말하길, 형부는 결혼 당시 모아둔 재산이 거의 없다고 했다. 자산관리에 대해서는 개인차가 있지만 서양문화권에서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많은 편인 것 같고 확실히 월급을 받으면 자기가 사고 싶고 하고 싶은 것에 완전히 올인하는 성향이 짙은 것 같다.
형부도 그런 소비습관으로 저축의 개념이 거의 없는 사람으로 보였지만, 언니와 생활하면서 완벽히 바꾸기는 어려워도 월급의 반은 저축, 반은 본인을 위해서 쓰기로 타협을 봤다고 했다. 각자 저축한 돈을 최종적으로 둘의 목표에 맞게 서로를 위해 사용하겠지만, 결국은 자산 관리는 각자 하는 게 그들의 현 상황이다.
또 다른 한국 부부의 케이스, 잠시 일을 쉴 때 단기 알바를 할 당시 같이 일했던 분의 상황이다. 무자녀로 오롯이 둘만 살고 있는 이 한국 부부는 자산관리는 철저히 각자 하고 있어서 남편이 얼마 버는지, 서로 얼마 큼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지 서로 모른다고 했다. 그분은 특히 프리랜서라 수입이 불안정한 편인데 급한 돈이 필요하거나 아프거나 공동으로 필요한 뭘 사야 할 때 어떻게 조율하여 비용을 충당하는지 이 부부의 가계 체계를 나는 물어볼 수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세한 상황을 못 들어 속단할 수는 없지만 얘기를 나눠보니 이 가족은 같이 집에서는 살지만(집도 남편 명의일 것이라 추측) 냉정하고 법으로 묶인 룸메이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가 생각하는 기준의 가족 분위기와는 매우 달랐다. 아무튼 각 커플마다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 상황 모든 게 다르니 어떤 것이 정답인지는 스스로들 알겠지 싶다.
우리의 소비습관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내가 말하면 한번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는 착한 성격의 남편은 뭔가 필요해서 사고 싶은 게 생겼을 때 망설임 없이 구매하지만 물욕도 그리 많지 않은, 맥시멀 리스트는 못 되는 남편이다. 반면, 난 가격부터 우선 고려하고 내가 이게 왜 필요한지 쓰지 않는 잡동사니를 만들지 않기 위해 엄청나게 시간 투자를 하며 미니멀리즘을 추구하지만, 굴러온 쇼핑백이라던가 묵은 물건들을 잘 처분을 못해 결국 놀림받는 미니멀리스트는 못 되는 아내이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생활습관 덕인지 초고수 짠순이셨던 할머니의 피를 물려받아서인지, 나도 경제관념이 확실하다. 그래서 남편이 샤워를 하는데 멀리 떨어진 거실 TV를 습관적으로 켜거나 온수를 사용하고 보일러를 끄지 않는 게 처음엔 나랑 참 다르다고 느꼈고 난 낭비되는 것에 대해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왜 TV를 켰냐고 물어보면 "그냥"이라고 대답해서 당장 보거나 듣지 않을 거라면 TV는 꺼야 한다고 남편에게 설명한 적도 있다.
한 번은, 복잡한 걸 싫어하는 남편이 잊어버려서 귀찮아서 사용기간 만료가 되었는데도 인터넷 해약을 하지 않아 조금 더 저렴한 H사로 갈아타려던 내 계획을 실행치 못하고, 자동 계약 연장으로 K사를 계속 이용하게 된 적이 있다. 근데 막상 나중에 실제 비용을 따져보니 크게 차이는 없어서 새 계약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아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남편과 나는 소비에 있어서 창과 방패(사자 vs 사지 말자, 외식하자 vs 집밥 먹자)처럼 힘겨루기를 하지만, 둘의 의견을 모으면 꽤나 만족스러운 결과로 대부분 이어졌다. (남편이 내 말을 더 따라주는 편이다.) 우리가 남들이 말하는 부자가 되면 어떻게 생활할지 상상이 안되지만,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씀씀이가 헤픈 사람이 되는 건 이미 그른 것 같다.
서로 다른 소비습관이 만든 긍정적인 효과
나의 짠순이 성향으로 할인이나 최저가를 찾는 게 습관이 되었고, 때로는 형편에 맞게 타협을 하거나 가끔은 불필요하지만 싼 맛에 살만한 제품들에 현혹되기도 한다. 남편은 넉넉하게 사는 습관이 있었고 결국 유통기한이 지나 쓰지 못하고 버리거나 사둔 걸 잊은 채 같은 것을 또 사기도 했으며 저렴한 가격에 선입견이 있는 편이었다.
그런 우리가 만나니, 쓸 때는 쓰고 아낄 때는 아끼는 현명한 소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좀 더 겉만 멀쩡한 것이 아니라 미묘한 차이더라도 가격이 더 나가더라도 품질이 좀 더 좋은 제품을 선택하는 성향으로 바뀌고, 남편은 필요한 만큼만 사고 애매하게 필요한 물건은 집었다가 고이 내려놓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또 다른 예로 난방을 할 때, 남편은 이제 평소 신경 쓰지 않았던 뜨거운 물을 쓰고 난 후 보일러를 잘 끈다거나, 평소 난방비 걱정에 부모님과 살 때도 이불 쓰고 옷을 껴입던 나는 남편이 켜놓은 온돌난방으로 훈훈해진 집안에서 더 이상 오들오들 떨지 않는다. 그리고 소비습관과 서로의 생활 패턴을 맞춰가면서 자연스레 남편은 늘 모자랐던 용돈을 여유 있게 쓰는 상황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서로를 배려하며 맞춰가다 보니 만들어진 서로에게 좋은 변화였다.
우리의 장단기적인 목표
우리는 둘 다 고연봉자도 아니고, 앞서 말했듯이 재테크에는 지식도 관심도 없거니와 현재 집을 사야 하는 당위성도 상황상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냥 개미처럼 일해서 재산을 차곡차곡 성실하게 모을 뿐이다.
그런 우리에게 당면한 목표는 지금보다 좀 더 큰 전셋집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걸 이루면 아마도 다음 목표는 ‘미국 집을 사는 것’이 될 수도 있고, ‘한국에 집을 사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쪽으로 결정이 되든 간에 둘이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의 목표’가 있다는 게 공동체 의식과 더불어 애정까지도 은근하게 달구어주는 거 같다.
이건 아마도 우리의 집을 꾸밀 때 하나하나 아이템을 같이 고르면서 차근차근 꾸며나가는 과정, 그리고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너무 마음에 쏙 들어 애정이 섞인 시선으로 함께 만들었던 공간의 모습을 보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