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다 버린 신발 신세라
잘 늙어가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닌 듯
“그때만 해도 이 늙은 몸이 쓰였지. 이곳에선 이제 신다 버린 신발 신세라. 잘나고 똑똑한 젊은 양반들이 나한테 일거릴 주어야 말이지. 참 법호가 어떻게 되시오?”
토지 2부3권 209쪽에서 인용/ 마로니에 북스
‘신다 버린 신발 신세라....’
의병에 가담했다가 서희 일행을 따라 간도에 간 김훈장의 말이다. 향반으로 평사리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서희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간도에서 고적한 말년을 보낸다. 듣기만 해도 별 쓸모가 없고 대접받지 못하는 처지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신다 버린 신발을 누가 찾아보겠으며 귀하게 생각하거나 존경할 수 있을 것인가? 신다 버린 신발이란 그저 아예 쓰레기통에 버릴 수도 있으나, 그래도 좀 아까운 생각이 들면 어느 한 구석에 던져놓기도 하는 그런 물건이다.
‘신다 버린 신발 신세’라는 말을 들으니 현대 사회에서 ‘노인’들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한평생 가족을 위해 일터에서 고생하다가 퇴직한 남편들이 삼식이 취급을 받게 된다면 그런 기분이 들 것이다. 엄마들도 마찬가지다. 젊어서는 아이들 키우고 남편 내조하느라 고생하고, 자식들 결혼시키고 나면 손주까지 키워주며 헌신한다. 하지만 그것도 손주들이 좀 크고 나면 금방 할머니의 잔소리 싫다고 짜증을 낸단다. 그럴 때 노인들이 ‘신다 버린 신발 신세’가 되었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어른들이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는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세상으로 바뀐 거다. 인생을 먼저 살아본 부모세대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네이버에 물어보면 웬만한 건 다 알 수 있다. 그래서 아예 영어로는 구글링한다는 말까지 생겼다고 한다. 아니 오히려 요즘은 디지털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어르신 세대가 젊은 자식들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컴퓨터 또는 핸드폰으로 무슨 일을 하다가 잘 모를 때는 바쁜 자식들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잠깐 물어보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알려주긴 하지만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다. 더러는 한 번 알려준 것을 잊어버리고 또 물어보다가 구박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신다 버린 신발 신세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흘러가니 ‘고려장’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늙고 쇠약한 사람을 지게에 지고 가서 산에 버리고 왔다는 고려장은 비단 우리나라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몽골 초원에서도 늙은 부모를 한 달 치의 양식과 함께 남겨두고 떠난다는 다큐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함께 이동하기에는 너무 노쇠한 것이다. 다음에 그 장소에 돌아왔을 때, 그 노인이 살아있다면 다시 한 달 치의 양식을 두고 떠난다고 한다.
밸마 윌리스의 소설 ≪두 늙은 여자≫에서는 알래스카 인디언의 풍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무리가 이동할 때 나이든 사람을 두고 가는 일이다. 남겨진 두 여자 칙디야크(80)와 사(75)는 어린 손자가 떠나면서 몰래 남겨두고 간 손도끼로 다람쥐를 잡아 수프를 끓여 연명하고 젊은이들의 도움을 받는 존재이던 모습을 버리고 독립적으로 살아보려고 애쓴다. 두 늙은 여자는 그럭저럭 살아남지만 역시 사람은 무리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몸이 음식을 필요로 한다면 마음은 친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살다가 늙는 일은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일이다. 젊었을 때는 나도 노인이 되리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늙음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다.
품위를 잃지 않고 잘 늙어가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우리 사회의 어르신들을 살아갈 미래가 짧은 ‘신다 버린 신발’처럼 바라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 어른들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해준 고마운 존재임을 잊지 말자고 스스로 에게 다짐을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