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낭만 좀 있어봐 눈이 오는데

by 은해


쌀알 같은 하얀 눈이 펄펄 날리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잔뜩 찌푸리고 흐리더니 해 질 녘부터는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왠지 몸이 축축 늘어지고 잠이 쏟아진다 했더니 눈이 오시려고 그랬나 봅니다.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서 저녁밥을 지으려고 쌀을 두어 컵 바가지에 담아서 씻고 있습니다. 쏴아 하고 수돗물이 바가지에 쏟아지면 하얀 쌀알들이 조금씩 떠오릅니다. 왼 손으로는 바가지를 든 채 오른손으로 쌀을 여러 번 씻어냅니다. 뽀얀 쌀뜨물을 싱크대에 쏟아버립니다. 쌀을 씻다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니 아까보다 더 많은 눈이 흩날리고 있습니다.

내 마음도 잠시 흔들립니다. 쌀 바가지를 손에 든 채 한참을 그렇게 내리는 눈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들 속에 눈과 함께했던 몇 조각의 추억들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갑니다. 그러나 이내 다시 현실로 돌아와 따끈한 찌개라도 끓여서 저녁상을 차리려고 냉장고를 열어보는데 전화가 울립니다.

왜냐하면 눈이 내리기 때문이지요.

“여보, 눈이 와. 눈···” 나도 알고 있는데 그는 무슨 기쁜 소식이라도 전하는 사람 같습니다. 눈이 내리면 그는 다소 흥분되나 봅니다. 눈이 내리기 때문이지요. “나가자. 어디로 갈까. 유명산 쪽으로 가볼까. 미사리 쪽으로 갈까.” “어디 가서 술 한 잔 해도 좋고, 아니면 차 한 잔이라도 하고 오자.” 눈이 내리면 그는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눈이 오니까요. “지금 집에 거의 다 와가니까 어서 준비해. 나가자.” 눈이 내리면 그는 어디든 나가자고 합니다. 눈이 펄펄 내리니까요.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 그냥 집에 있으면 무슨 흰 눈 모독죄에라도 걸리는 양 그는 무조건 나가자며 보챕니다.

눈이 와서 길도 미끄러운데 그냥 들어오라고, 길이 미끄러우면 운전도 위험할 수 있으니까 그냥 들어오라고, 눈이 오면 좋아서 뛰쳐나가는 건 아이들과 동네 강아지들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그냥 들어오라고 달래고, 놀리고 약을 올려봅니다. 그랬더니 그가 투덜댑니다.


“제발, 낭만 좀 있어봐. 눈이 오는데···”

달콤한 모과향이 모락모락 올라옵니다.

가평 유명산 자락에 있는 찻집에서 모과차 두 잔을 앞에 놓고 창밖을 바라다봅니다. 그가 좋아하는 눈이 아직도 내리고 있습니다. 쌀알 같은 흰 눈이 펄펄 내리고 있습니다. 겨울의 한가운데인 12월의 추위가 대지를 꽁꽁 얼어붙게 하는데, 눈이 오는 날에는 왜 이렇게도 우리들의 마음은 오히려 따뜻해지는 걸까요. 하얀 눈이 펑펑 내려 더 많이 쌓일수록 우리들의 마음은 더욱더 따뜻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뽀얀 쌀밥이 밥솥에서 익어갈 때처럼.

집을 나와 올림픽대로를 지나서 춘천 가는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달리던 차 안에서 그가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을 꼬옥 잡습니다. 나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해주었습니다.

“작업 걸지 마···”

그러자 차창 밖에 흩날리는 눈송이들도 저희들끼리 장난을 치며 키득거립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춤을 추며 떨어지는 모양새가 정겹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초가지붕에 눈이 소복이 쌓인 어느 산골 외딴집에서 새어 나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같습니다. 아무리 한 데가 추워도 가슴속을 따뜻하게 해주는 소리입니다.

식사를 하면서 마신 ‘처음처럼’ 때문일까요. 우리는 모과차 두 잔을 앞에 놓고 서로 수줍은 듯 바라만 봅니다. 33년 전 동원 극장 2층에 있던 동원 다방에서 처음 만나 맞선을 보던 날처럼, 그렇게 처음처럼. 눈이 내려 쌓이듯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둔 이야기들을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이.


눈이 제법 쌓이더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가고 있습니다.

창밖에 서있는 나무도 저 멀리 보이는 유명산 자락도 온통 하얗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찻집 주변에 널려 있던 잡동사니들조차도 하얀 눈으로 덮여 마치 유명한 조각가의 조각 작품인양 아름다워 보입니다.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날은 서로의 크고 작은 허물들도 다 덮어줄 수 있을 만큼 너그러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눈이 내리니까요.


새하얀 눈이.


그동안 짧지 않은 시간들을 함께해 오면서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펄펄 내리는 흰 눈이 우리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것일까요. 내리는 흰 눈이 지나간 우리의 아픔도 다 덮어주는 것만 같습니다. 포근한 솜이불을 덮은 듯 마음은 자꾸만 따뜻해집니다.

내리는 눈 때문인지 찻집 주인장의 인심도 넉넉합니다. 커피도 아닌 모과차를 리필해주고 맛보라며 유명한 가평 잣까지 덤으로 내줍니다. 입 안에서 씹히는 잣의 고소함은 살면서 예기치 않게 만나게 되는 눈 오는 날의 데이트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로맨티시스트인 그에게 농을 건넵니다.

‘낭만 없는 나 같은 현실주의자랑 사느라 힘들었지?’ ‘그래··· 낭만 좀 있어봐···’

창밖엔 솜사탕처럼 달콤한 낭만이 펄펄 내리고 있습니다.

또 맞은편 창틀 위에는 쌀알 같은 흰 눈이 사그락사그락 쌓입니다. 솜사탕이든 쌀알이든 상관없습니다.

그저 눈이 내려서 마음이 따스해지는 시간들이 그렇게 쌓여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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