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적저작물
아주 오래전, 에드몽 로스탕이 쓴 시라노를 책으로 처음 만났다.
시라노는 17세기 프랑스의 실존 인물인 시라노 드 베르쥬라크의 일생을 모티브로 한 희곡이다. 시인이자 검객이었고, 삼총사의 주인공 달타냥의 모델이 되기도 한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 시라노가 뮤지컬로 공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사실 이때만 해도 배우 분들을 잘 몰라서 캐스팅을 고민하지는 않았고, 그냥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최대한 빠른 날로 예매를 했다. 그리고 류라노, 아니 류정한 배우님과 나하나 배우님, 그리고 김용한 배우님이 시라노의 3인방을 연기한 공연을 관람하게 됐다.
사실 공연을 보기 전에는 '스토리와 대사까지 모두 다 꿰고 있는데 재미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섰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민이었다.
책을 읽을 때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말장난이었다. 프랑스 고전이다 보니 그들만의 언어, 그들만의 감성으로 그들만이 웃을 수 있는 말장난이 상당히 많았는데, 번역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각주를 보며 겨우 겨우 읽어나갔다. 그런데 뮤지컬 시라노는, 원작의 말장난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만의 언어, 우리만의 감성으로 우리도 웃을 수 있는 참신한 말장난 대사를 만들어냈다. 삼행시, 사행시 등의 방법으로 녹여내면서 말이다.
게다가 작은 공간이었지만 알차게 무대를 활용한 무대 연출과 안무, 그리고 배우분들의 연기는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오페라글라스를 빌려 중간중간 배우 분들의 표정을 가까이서 봤는데, 이렇게 오픈된 공간에서 라이브로 연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순간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록산 역을 맡으셨던 나하나 배우님의 노래에 푹 빠져버렸다.
우리 저작권법은 2차적저작물이라는 개념을 인정하고 있다. 딱 보기만 해도 어떤 개념일지 예상할 수 있는 일차원적인 조어다. 2차적저작물이란 원저작물을 번역ㆍ편곡ㆍ변형ㆍ각색ㆍ영상제작 그 밖의 방법으로 작성한 창작물을 말하는데, 원저작물의 창작적 표현에 더해 2차적저작물 작성자의 새로운 창작성이 부가된다면 이는 원저작물과 별도로 별개의 저작물로 인정된다. 그리고 저작권자는 이러한 2차적저작물을 작성할 수 있는 권리인 2차적저작물작성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저작권자가 아닌 사람이 원저작물을 기초로 한 2차적저작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2차적저작물작성권을 가지고 있는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허락 없이 2차적저작물을 만든다면 저작권자의 2차적저작물작성권을 침해하게 된다.
뮤지컬 시라노를 예로 들어보자. 원저작물은 어문저작물인 희곡 '시라노 드 베르쥬라크'이며, 원저작물의 저작권자는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이다. 그리고 이를 번역하고 각색한 뮤지컬은 2차적저작물에 해당한다. 따라서 시라노 드 베르쥬라크를 번역하거나, 뮤지컬 대본으로 각색하려면 (저작재산권이 양도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에드몽 로스탕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저작권법에 따르면 저작권은 저작자가 살아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저작자가 사망한 후에도 70년까지 존속하게 되어 있다. 이는 프랑스 저작권법도 마찬가지인데, 에드몽 로스탕은 1918년 12월에 사망했다. 따라서 1990년 이후에는 저작권이 없게 되고, 그렇다면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자유롭게 이를 복제하거나 2차적저작물을 작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뮤지컬 시라노의 대본을 그대로 이용하여 누군가 공연을 해도 되는 걸까? 한국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시라노의 대본은 2차적저작물에 해당한다. 2차적저작물은 원저작물과 별개로 새로운 저작물로 인정되기 때문에 원저작물의 저작권이 소멸되었더라도 2차적저작물의 저작권은 여전히 존재하며, 2차적저작물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이를 이용해 공연을 한다면 2차적저작물 저작권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게 된다.
뮤지컬 시라노 후기도 쓸 겸, 2차적저작물에 관하여 간단하게 살펴봤다. 이것저것 자세히 파고들거나 예외적인 것까지 설명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아서 괜히 허겁지겁 마무리하게 된 것 같지만, 다음에 또 다뤄볼 주제가 있을 테니 여기서 끝내도 괜찮을 것 같다.
뮤지컬은 종합예술이다. 대본, 연기, 안무, 음악, 무대, 소품, 연출 등 다양한 요소가 엮여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연장에서 배우 분들의 연기와 노래에 매료되지만, 그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이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일까? 같은 뮤지컬을 여러 번 보다 보면 처음에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어서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실 말이 쉽지, N차 관람을 하기엔 대극장 공연의 가격이 조금 부담스럽긴 하다. 3층 구석에서 보면 저렴하게 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좋은 자리에서 봐야 제대로 즐길 수 있으니... 반면 소극장은 어느 자리에 앉아도 재미있게 볼 수 있어서 편하게 티켓팅을 할 수 있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해서 N차 관람을 하기도 좋다.
류정한, 최재웅, 조형균 배우님의 시라노를 보았고, 나하나, 박지연 배우님의 록산을 보았다. 그리고 아쉽게도 크리스티앙은 김용한 배우님의 공연밖에 보지 못했다.
같은 배역 같은 대사인데 어쩜 이렇게 느낌이 다를 수가 있을까? 배우 분들의 연기와 노래 실력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장면 장면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그 디테일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런 차이를 보고 느끼니 더 빠져버리고 있다.
시라노 재연이 2019년 10월 13일로 막을 내렸다. 너무 마음이 아프다. 언제 또 이런 작품을 볼 수 있을까? 시라노 역을 맡으신 류정한, 최재웅, 이규형, 조형균 배우님, 록산 역을 맡으신 나하나, 박지연 배우님, 크리스티앙 역을 맡으신 송원근, 김용한 배우님, 드기슈 역의 조현식 배우님, 르브레 역의 최호중 배우님, 라그노 역의 육현욱 배우님, 그리고 가스콘 부대와 시인들, 오프닝 삐에로, 귀족 등 다양한 역으로 고생해주신 김효성, 문갑주, 강동우, 지원선, 추광호, 이무현, 김강진, 정원철, 전기수, 손준범, 김대식, 장예원, 김수정, 가희, 강기연, 이은지, 이정은, 임소윤 배우님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언젠가 또 다른 공연에서 만나 뵐 수 있길.
CJ님들 삼연, 아니 블루레이, 아니 DVD라도 좋으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