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 세이코(SEIKO)의 전설적인, 그러나 이제는 단종된 SKX007(Timelinewatches)
와, 저 시계 뭐지. 물어봐도 되나
어디선가 읽었는데, 아, 여기 있다. 2020년 9월 20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곽노필 기자의 기사 "애플 워치, 5년 만에 스위스 시계 200년의 벽을 넘다"를 살펴보면 2019년 애플 워치의 출하량이 3070만 개였던 반면, 스위스 시계의 경우는 2100만 개에 그쳤다고 한다. 물론 이것을 가격으로 환산한다면 분명 애플 워치보다 몇 배는 비싼 스위스 시계 산업의 매출이 더 많겠지만, 문제는 손목은 하나라는 거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늘 내 손목에 올라갈 물건으로 몇천 몇백만 원을 호가하는 초호화 기계식 태엽 시계보다는 현실적인 가격의 애플 워치를 선택한 거다. 20년도 안된 굴러들어 온 돌이 200년간 박혀있던 돌을 빼냈다.
요즘은 누구나 애플 워치, 갤럭시 워치 혹은 다양한 스마트 워치를 차고 다닌다. 이들은 사각형인지 원형인지 같이 모양에서만 조금 차이를 가질 뿐, 대부분 조그마한 스마트폰 액정처럼 까맣다. 그래서 그런지 그 사이에 있는 아날로그시계들은 눈에 참 잘 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시계들을 볼 때마다 집요할 만큼 쳐다본다. 언젠가 친구에게 내 첫인상을 물었는데 '네가 계속 내 시계를 보길래 민망했다'라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는 친구가 찬 시계의 브랜드를 오직 인터넷에서만 봤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아직도 그 브랜드를 떠올리면 그 친구가 떠오른다.
또 어느 날은 오랜만에 같은 웹진 동료들과 회의를 가졌다. 코로나가 끝나고 나서 정말 오랜만에 갖는 오프라인 회의여서 두근두근 했더랬다. 그때 한 분이 눈에 띄었다. 이번에 석사 논문을 완성하신 A님, 손수 적어주신 편지를 논문에 붙여서 내게 주신 A님. 나는 그 A님께 정말이지 묻고 싶었다. 시계 좀 봐도 되냐고, 로마자 인덱스에 패턴이 들어간 흰색 다이얼, 드레스 시계처럼 아담한 사이즈를 가진 그거 혹시 프레드릭콘스탄트의 시계냐고, 오토매틱인지 쿼츠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A님께선 시계를 좋아하시냐고, 저 브런치에 시계 글 쓰는데 봐주실 수 있냐고. 결국 그날 회의를 하느라 못 물어보긴 했다. 그분 논문 제목이 뭐였더라, 보자마자 좋다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다음에는 꼭 시계 어디 건지 물어봐야지.
이런 상황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종종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카페 산업에서만 아르바이트를 해왔다. 카페에서 일하다 보면 무언가를 '보는' 일이 잦다. 예를 들어 연예인이거나 혹은 연예인을 왜 안 하신 걸까 싶은 일반인, 매일 오셔서 같은 메뉴를 주문하시는 단골손님, 하루종일 앉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 등등. 이런 일들은 보통 카페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에 따라 다르다. 방송가라면 연예인들을 많이 볼 것이고, 대학가라면 대학생들을 많이 볼 것이다. 내가 일한 곳은 꽤 큰 사무실들이 모여있는 커다란 빌딩 1층에 있는 카페였다.
손님이 카드를 건네는 그 순간, 잡지에서만 보던 시계가 눈앞에서 지나갈 때 정말 기함할 뻔했다. 저기 실례합니다, 선생님. 그거 혹시 제럴드 젠타가 직접 디자인한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인가요? 빈티지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새로 구매하신 신품인가요? 실례가 안 된다면 다이얼이라도 한 번 구경할 수 있는 영광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그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이후, 그 카페를 생각할 때면 내가 매일 만들던 시그니처 메뉴보다 그 시계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일주일에 며칠씩,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사람들의 손목 위에 얹힌 시계를 눈으로 좇는다. 같은 사무실의 저 직원이 차고 다니는 시계의 다이얼은 노란색이고 저런 모양이니까, 아마 타이맥스일 거야. 저 직원 분이 차고 다니시는 건 까르띠에 탱크 스몰인데, 다이얼에 오토매틱이라는 문구가 없으니까 아마 쿼츠일 가능성이 높아. 저 사람이 찬 시계는 뭐지? 아, 시계줄이 아코디언 모양의 고무 소재인 데다가 너무 아이코닉한 디자인이야. 분명 지금은 단종된 세이코의 SKX 시리즈일 거야. 나도 내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무실 밑 편의점의 직원분이 차고 다니는 시계가 세이코 프리미어 하트비트인 건 안다.
심지어는 온라인 중고시장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무엇을 파는지 구경하며 시간을 보낸다. 와, 이 시계 브랜드는 국내에 수입되는 제품도 아니고 본토에서만 판매하는 건데, 이 분은 이 시계를 대체 어디서 난 걸까. 이 분은 항상 개쩌는 빈티지 시계를 올리시는데, 같이 곁들여지는 본문의 내용을 보건대 분명 단순한 판매자는 아닌 것 같다. 아니, 이 시계는 지금 시장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중고 시장에 올라왔네? 생각보다 실제로 쓰기에는 불편한가? 이런 이유로 나에게는 이곳이 곧 내 시계 커뮤니티이다. 여기에 더해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올라오는, 해외의 신생 마이크로브랜드 시계들까지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결국 내가 남의 손목 위에 올라가는 게 뭐가 그리 궁금한지는, 결국 내가 남의 시선을 무척 신경 쓰는 사람이라 그렇다. 그래도 길을 걷거나 대중교통 속에서 같은 아날로그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역시 곁눈질을 그만둘 수 없다. '세상에는 수만 명의 사람이 있는 만큼 수만 개의 취향이 있다'던 <생활인의 시계> 유튜브 채널 호스트 김생활님의 말을 따라, 그 사람의 취향이 무엇일지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만난 어떤 노인의 손목 위에 올라가 있는 빈티지 롤렉스부터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청년의 크로노그래프, 그리고 내가 차고 나온 시계까지. 정말 매번 그들을 붙잡고 묻고 싶은 것이다: 와! 그 시계 뭐예요? 봐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