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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경 Jul 18. 2023

언젠가는 세상이 내 시계의 가치를 알아줄 거야

항상 눈여겨보는 브랜드 스피나커의 스펜스300 SP-5124-11(spinnakerwatches)


언젠가는 세상이 내 시계의 가치를 알아줄 거야




"브랜드인지도로 보나 헤리티지로 보나 시계는 롤렉스가 짱이다!"
"아니다, 시계 마감과 시계 자체로만 따진다면 그랜드세이코가 짱이다!"
"미안하지만 시계 브랜드의 정점은 파텍필립이다!"


나는 저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저런 말 들을 필요 없어"하며 내 자그마한 시계의 두 귀를 꼬옥 막아준다.  우리 애들 기를 죽이고 그러세요.


'시계계급도'나 'Fine Watch List'를 그린다면 내가 갖고 있는 대부분 시계의 브랜드는 명단의 피라미드 아래에 있거나 혹은 아예 찾아볼 수도 없다. 그도 그럴게, 웬만한 럭셔리 시계는 이미 내 생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기 때문이다. 시계 계급도는 높은 브랜드와 낮은 브랜드를 나누고, 계급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자는 후자보다 높은 가치를 갖는 위치에 놓인다. 내가 내 시계를 좀스럽다거나 쫌스럽다, 잡스럽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가진 시계들은 분명 럭셔리가 아니기에, 그리고 나도 그 럭셔리 시계를 무척이나 원하기 때문에.


이것과는 별개로, 저 발화들에는 재미있는 지점이 있다. 시계계급도를 그릴 때마다 눈에 띄는 것인데, 이 그림에서 강조되는 것은 개별 시계가 아니라 시계의 브랜드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시계의 구입은 곧 브랜드의 구입과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특정 브랜드에 대한 팬심과 특정 시계에 대한 애정은 어떤 지점에서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나는 A라는 브랜드의 입문용 시계를 하나 갖고 있다. 이전 사용자가 15년 전에 구입해서 온갖 방법으로 다 사용하다가 너덜너덜해진 것을 온라인 중고시장에 너덜너덜한 가격으로 올렸길래 "감사합니당!"하고 구입해 온 것이다. 나는 기스를 지우는 물건 등을 구입해서 그 시계를 뽀득뽀득 닦았더랬다. 그랬더니 나쁘지 않은 외관이 되었고, 우리는 앞으로 50년은 더 함께하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시계잡지를 보다가 나는 A 브랜드가 이번에 환경을 지키는 프로젝트를 새로 열었다거나, 기가 막힌 기술 혁신을 이뤄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A 브랜드에 대한 개쩌는 역사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때 나는 이 소식을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아! 역시 우리 A 브랜드가 최고야! 이 브랜드의 시계가 있는 내가 자랑스러워!'


이러한 생각이 허영심에서 비롯된다거나 혹은 말도 안 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브랜드는 하나로 묶을 수 없을 만큼의 제품을 생산하지만 분명 어떤 일관된 경험을 제공하고, 브랜드를 향한 소비자의 팬심은 브랜드가 주요하게 만들고자 하는 하나의 가치이면서, 소비자들에게는 브랜드의 커뮤니티를 이용하는 등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다. 나조차도 그런 연결감을 무척 좋아한다. 그러나 이 브랜드에 대한 팬심은 시계 자체를 넘어서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니까 꼭 시계함 앞에 서서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 시계를 찰까. 아니야, 이 브랜드는 다른 사람들이 못 알아볼 거야.' 마치 다른 브랜드는 사람들이 알아보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시계가 하나의 액세서리라면, 그래, 나는 사람들이 알아봐 주길 바란다. 이 시계를 차고 있는 나 자신을 상대방이 어떻게 봐줄지 의식하고, 이 시계 브랜드에 대해 혹은 이 시계 자체에 대해 물어주길 바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덕질 토크가 그렇듯이 '와, 그 시계 진짜 예쁘다'하고 말하는 순간, 그 질문은 엎질러진 물처럼 이제 주워 담거나 되돌릴 수 없고, 그 말을 던진 게 당신이라면, 당신은 그 질문의 청자에게 '시계에 흥미를 가진 사람'으로 찍혀서 매번 마주칠 때마다 시계에 대한 온갖 쓸모없는 지식을 듣게 될 것이다. 이런 건 사랑하는 사이라도 어려울 것이다.


누가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과 내가 시계를 차는 행위는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의 이런 마음이 질리다 못해 익숙해졌으니 이제는 시계를 바라보며 느끼는 강박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하하. 어쩌겠어. 괜히 강박증 진단을 받은 게 아닌걸.


이러한 브랜드에 대한 팬심은 또 다른 영역으로 이어진다. 바로 '아, 그 브랜드 시계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브랜드는 여러 가지 제품들을 만들면서도 일관된 이미지를 구축하고 소비자에게는 일관된 경험을 제공하고자 한다. 어떤 시계 브랜드는 자신이 가진 역사적 헤리티지를 강조하기 위해 거의 모든 시계를 엇비슷한 디자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또 다른 브랜드는 제품들의 디자인은 다를지언정 '신화', '자연', '음악'과 같은 하나의 테마를 전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시계를 고를 때 브랜드라는 것은 그 시계를 구입하려는 사람에게 있어 어떤 기대할만한 지표가 되어준다. 이건 그 브랜드의 계급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오늘 아침에도 나는 B 브랜드의 시계를 다루는 <생활인의 시계> 유튜브를 보고 나서 곧장 온라인 중고 시장에 그 브랜드를 검색했더랬다.


그렇네, 이렇게 해서 내 시계가 늘어나게 된 것이다. 나는 인간이어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나잇값을 못하는 것 같지만 원래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과 지혜로워지는 것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A 브랜드의 팬으로서 그들의 무궁한 영광을 빈다. 장수와 번영과 포스가 함께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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