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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경 Jul 18. 2023

이것들 살 바엔 돈 모아서 롤렉스사지 그랬어

다 죽어가지만 여전히 전설적인 1961년 Rolex  Submariner 5512(timeline watch)


이것들 살 바엔 돈 모아서 롤렉스사지 그랬어




사촌형에겐 빈티지 롤렉스가 있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데, 내가 꿈만 꿔 본 시계를 손에 올리고 있다면 전신에 안 아픈 곳이 어디겠는가. 온몸 구석구석 차오르는 질투를 어떻게 숨길 수도 없다. 사촌형의 빈티지 롤렉스는 진짜 멋있고 나도 갖고 싶다.


사촌형과 몇 주일 간 같이 지낸 적이 있다. 내가 얹혀사는 조건으로 이것저것 집안일을 하던 시기였다. 그동안 알아낸 것이 있다면 그가 차고 다니는 시계는 그거 하나인 듯하다는 것이다. 나처럼 딱히 오늘 시계함 앞에 서서 죄다 비슷해 보이는 시계를 요리조리 차보는 일도 없었고, 딱히 시계가 고장 나는 상황을 상상하며 불안해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그 시계 하나만 여유롭게 달랑달랑 차고 다니는 그를 보며 나는 시계함 앞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 시계 가격을 찾아봤냐고? 마치 그 시계의 가격을 알면 '훗, 뭐, 그렇게 비싸지 않네'라거나 '아, 진짜 비싼 걸 보니 이 형이 아주 열심히 살았구나' 할 수도 있으니까? 그것은 시계를 그저 금전적 가치로 파악하는 일이고, 그것은 내가 시계를 보고자 하는 입장과 매우 다른 입장이지만, 검색은 해봤고, '아, 이 형이 열심히 살았구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계 가격을 알게 되자 나는 내 시계함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이것들 살 바엔 돈 모아서 롤렉스사지 그랬어.


실제로 그 쫌스러워 보이는 시계들을 하나씩 구입할 때는 적지 않은 가격이었다. 그렇다, 만약 이것과 저것, 혹은 이 시계함 전체를 사지 않고 돈을 모았다면, 빈티지 롤렉스 하나 장만하고 남은 돈으로 아이스크림도 먹을 수 있었다. 만약 사촌형이 그의 손목에 멋들어지게 올라간 시계를 풀어서 내게 건네며, '시계 다 내놔'한다면 나는 내 흔들리는 동공과 올라가는 입꼬리와 '진짜지?'하고 묻는 일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정말 그게 잘하는 일인가에 대해서는 나는 딱히 정확하게 정의 내리지 못했다. 정말 이것들을 다 처분하고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제일 좋은 시계를 사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쫌스러운 내 시계들에게 '건강하게만 자라다오'하고 말하며 무덤까지 가는 게 나은지는 잘 모르겠다. 나의 현실은 후자이지만, 나 역시도 전자의 욕망을 갖고 있으니까. 다만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 정도겠다.


이 글을 쓰면서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됐지'하고 생각해 봤는데, 이유는 너무 명확하게도 하나였다: 과소비.


허구한 날 매일매일 출석체크 도장 찍듯이 온라인 중고시장, 온라인 당근시장, 온라인 번개시장을 돌아다니고 알리익스프레스도 돌아다니는 나는, 매번 새로운 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뭐 먹을 거 없나'하고 냉장고를 열어보는 딱 그런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다가 새로운 게 있으면 별로 고민도 안 하고서 '오 이건 뭐야'하고 입에 넣어보는 것처럼, '오 이 시계를 이 가격에?' 하며 판매자에게 자연스럽게 문의를 넣는 것이다. 문득 그의 계좌에 돈을 송금하려고 내 계좌에 들어갔다가 흠칫 놀라는 경우도 있으나, '중고거래에서 계좌를 받은 이상 입금하는 게 도리다'같은 말도 안 되는 당위성을 들면서 돈을 송금하는 것이다. 내 시계함을 차지하는 시계는 거의 예외 없이 이런 과정들을 통해 내게 왔으며, 눌러앉은 길고양이들처럼 내 눈을 사로잡아버렸고 나는 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호랑이가 되지 못한 나의 어린 야옹이들.


좋아, 그건 지나간 일이다. 갑자기 타임머신 기술이 상용화되더라도 내가 바로잡아야 할 과거의 일이 이미 너무 많으므로, 내가 시계를 사려던 그 모든 순간으로 돌아가서 '그 시계 사지 말고 계좌에 저축해'하는 일은 나의 '바로 잡아야 할 일 to-do list'에서 우선순위가 꽤 낮다(그리고 분명 내가 과거의 나를 밀착 감시하지 않는 이상, 분명 다른 시계를 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제값을 받는 경우는 드물고, 웃돈을 받는 일은 아예 없겠지만, 어쨌든 지금부터라도 내가 가진 시계를 모두 팔아서 다 죽어가는 롤렉스를 사는 것은?


이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상상을 하기는 한다. 가령 주변 지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혹은 잃어버린 자아를 찾으러 산티아고 순례길에 갈 일이 생긴다면, 이 시계들을 모두 팔아서 그 여비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시계들을 내가 모두 판다 해도 내가 썼던 돈만큼 계좌에 돈이 꽂히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저 시계들 중 몇몇은 낮지 않은 금전적 재화로 교환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고, 낮은 금액으로 교환되는 대다수의 시계들까지 합한다면 정말 가고 싶은 곳의 왕복 비행기 티켓 정도는 나올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황에서 시계와 돈 사이에 놓인 한 가지 중요한 과정이자 노동을 잊고 있다. 그렇다. 누가 그 시계를 팔 것이며 어떻게 팔 것인가.
셀 수 없이 많은 노동들이 우리의 삶을 구성한다. 만약 나는 신경도 안 썼는데 화장실이 더러워진 꼴을 본 적이 없다면, 왜인지 밥통 안에 있는 밥이 쉬어버린 적이 없고 매번 새로운 밥이 담겨있다면, 그것은 분명 가사를 전담하는 누군가의 끊임없는 노동의 결과다. 더러운 화장실에서 깨끗한 화장실이 바로 도출되지 않듯이, 시계를 돈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시계를 파는 노동 행위가 필요하다. 이 노동은 절대 만만치 않다. 수없이 많은 모르는 번호로부터 날아오는, 스모 선수 같은 가격 후려치기를 감당해야 하고, 팔리지 않는 매물의 이유를 고민하며 '정말 여기서 만 원을 깎으면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더 돌아봐줄 것인가'하는 고민도 해야 하며, 계좌에 돈이 꽂히더라도 우체국에 갈 시간을 만들고 하나하나 정성스레 포장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이런 노동에 한 자릿수도 아니고 두 자릿수를 곱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구구단은 분명 9x9가 최대인데 갑자기 19x19를 해야 하고, 나아가서 그 한 번 한 번을 아주 정성스럽고 성가시게 고민해야 한다. 그러므로 저 모든 시계를 팔아 롤렉스를 마련하는 일은, 내가 좀스러운 새로운 중고 시계를 구입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하고 묻는 많은 이들처럼 나도 내 시계들을 그런 눈으로 볼 때가 있다. 나에게도 여전히 정말 정말 갖고 싶은 시계가 있고, 만약 '그거 살 바엔~' 하는 말의 요지를 이해하고 지침을 충실히 따랐다면 그 시계를 가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됐고, 나는 내 기회비용과 팔랑귀 사이에서 오늘도 아기코끼리 덤보처럼 온라인 중고시장으로 훨훨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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