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리얼중독자 Jan 26. 2024

"너는 시계의 어디가 좋은 거야?"

오래된 보스톡 시계의 광고(WatchUSeek Forum)


"너는 시계의 어디가 좋은 거야?"




다시 이 질문이다. 나는 시계의 어디가 좋은 걸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 커플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게 된다.


일단 요즘의 근황에서부터 시작해 보자면, 나는 최근 보스톡(Vostok)의 시계에 깊이 빠져있다. 그들이 일으킨 전쟁과는 별개로, 러시아에서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만들어온 이 역사적이고 컬트적인 군용 시계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다. 마땅치 않은 재료와 설비로 그 시대의 롤렉스(Rolex) 서브마리너(Submariner)와 블랑팡(Blancpain)의 피프티 패덤스(Fifty Fathoms)를 이겨보겠다는 결심으로 만들어진 설계가 특히 인상적이다. 여기에 더해 시대를 앞서간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시대착오인지 모를 디자인까지 더해지니, 이 군용 시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뛰어난 내구성과 저렴한 가격도 한몫했다. 나는 없는 세간살이에도 불구하고 보스톡 시계를 두 점이나 구매해 버렸다.


덕분에 요즘은 저도 의도하지 않았던 긴축 재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고 싶은 책과 먹고 싶은 간식을 보며 다음 월급까지 참아낼 수밖에 없다. 나는 새로운 시계를 좋아하게 되었고, 결국은 또 시계를 사버렸으니까.


내게 시계를 좋아한다는 것은 시계를 구매한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게 내게 있어 지속 가능한 방법일까?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푼 돈이라도 쓰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 마련인데, 문제는 시계가 아무리 저렴해봤자 푼돈이 아니고 소낙비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계를 사고 시계를 모으고 시계를 만드는 것 말고 시계를 다르게 좋아할 수는 없나? 그래서 나는 시계 사진을 모으게 되었고, 최근 내 시계 폴더 속 사진은 10,000개를 넘겼다. 이 속에는 내가 온라인 중고 시장을 돌며, 구글링을 하며, SNS에서 스크린샷을 찍어가며 모은 사진들이 잔뜩 들어있다. 이제는 이것도 모자라서 생전 하지도 않던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가입해 시계 사진을 매일 스크롤하고 있다. 비싼 시계던지, 싼 시계던지, 새 시계던지, 낡은 시계던지 간에 모두 열린 마음으로 덕질하고 있다.


조금 더 생산적일 수는 없을까? 아마 이 지점은 시계의 역사를 공부하는 일이 답이 될 수도 있겠다. 1700년대부터 꾸준히 기술의 발전을 거듭해 오며 지금에 다다른 시계 기술은 그 과정에서 수많은 역사와 만나왔으니 말이다. 세계대전 속 트렌치 시계(Trench Watch), 폭격을 위해 개발된 파일럿 시계 그리고 또 다른 군인을 죽일 때 그들이 차고 있던 필드 시계. 거기에서 나아가 수많은 예술가들의 손목 위에서 존재감을 자랑하던 카르띠에(Cartier)의 탱크(Tank) 같은 아이코닉한 시계, 혹은 수많은 매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오메가(Omega), 독사(Doxa), 세이코(Seiko)의 시계들. 이런 역사뿐만 아니라 최근 등장하기 시작한 2000년대 전후의 마이크로브랜드까지 합한다면 시계에 대해 공부하는 일과 그 즐거움은 분명 하루아침에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너는 시계의 어디가 좋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최근 시계를 분해하거나 그려봐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조만간 남아있는 무브먼트를 분해하거나, 시계 기술을 배우거나,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시계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릴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적어도 시계에 대한 글은 쓰고 있다는 점이 다행스럽고 즐겁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슨 시계를 가져간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