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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hadi Sep 28. 2021

민들레는 민들레


어렸을 때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직업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부터 막연히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 거라고 믿었다. 늘 빈 종합장이나 교과서 귀퉁이에 그림을 끄적이는 게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그리는 일과는 꽤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림을 그려본 게 언제였던가. 삶이란 놈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언제나 우리를 뜬금없는 곳에 데려다 놓는다.


이쯤 되었으면 이제 다시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직업을 바꾸거나 그림을 그려 성공하겠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그냥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다시 그림을 그렸다. 매일 조금씩 그리기도 했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그렸다. 사실 꿈이란 게 별건가.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내 꿈은 이루어진 거지.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 별로 읽지 않던 그림책에 어른이 되고 정이 붙었다. 그림책의 가장 큰 장점은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좋은 점이 오래 읽을 수 있다는 거다. 그림책은 가볍게도 볼 수 있고 오래도 볼 수 있다. 여러 번 봐도 질리지 않고 볼 때마다 새롭다. 이것이 그림의 힘이라고 믿는다. 어떤 날엔 그림책 속 마음에 드는 장면을 펼쳐 책상 위에 세워둔다. 애호의 끝을 소유로 두는 나에게 그림책은 최고의 미술작품이다.


언젠가 내 그림과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을 내고 싶다. 여러 번 투고에서 거절당했지만 오래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 나는 못 믿어도 시간의 힘은 믿는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마음을 다잡아봐도 여기저기서 만나게 되는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때가 있다. 세상은 넓고 재능 있는 사람은 많고 나만 한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날. 내가 그리고 쓰는 모든 것들이 의미 없이 느껴지는 날. 언젠가가 아니라 영원히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은 날.


그런 날에도 그림책은 좋은 치유제가 되어준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민들레는 민들레>를 읽었다. 시간이 없어 책장 앞에서 휘리릭 책장을 넘겼다. 마음에 들어 책이름도 메모해두었지만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금세 잊혔다. 한참이 지나고 몹시 더운 어느 날, 더위에 지쳐 낯선 카페를 찾았다. 시원한 음료를 한 모금 마시니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인테리어에 꽤 신경을 쓴 카페였다. 한쪽 벽에 액자처럼 걸쳐진 책이 보였다. 구면이었다. <민들레는 민들레> 그래, 이 책이었지! 돌아오는 길에 책을 주문했다. 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이라고 하지 않는가. 자꾸 하다 보면 내 꿈도 운명이 되겠지.


민들레는 솜털 같은 깃이 달린 씨앗 덕분에 어디에나 갈 수 있고, 튼튼한 뿌리 덕에 어디서나 잘 자란다. 이곳저곳 가리지 않는 민들레는 여기서도 민들레, 저기서도 민들레다. 혼자여도 민들레고 둘이여도 민들레다. 꽃이 펴도 민들레고 꽃이 져도 민들레다. 민들레는 언제, 어디서나 민들레다. 준이도 알만한 것을 나는 왜 자꾸 까먹는지 모르겠다.


비교하지 말자. 그림도, 글도, 인생도 그냥 내식대로 하면 되는 거지. 잘하지는 못해도 오래는 할 수 있다. 오래 하다 보면 언젠가 그런 날도 있겠지. 아니면 개같이 열심히 벌어서 정승같이 내 돈으로 출판해도 되는 거고. 내 꿈은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내가 그리고 쓴 그림책 하나 갖는 것이니 마냥 허무맹랑한 소리도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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