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갈 때마다 근처 독립서점에 들른다. 그곳에서 베스트셀러에서 보지 못한 귀한 책들을 만난다. 서점 주인이 정성껏 큐레이션 한 책들 중에 나와 인연이 닿은 책을 골라 담는다. 그 잠깐의 여유가 참 좋다. 너무 '열심히'가 될 뻔한 여행에 적당한 브레이크가 되어준다. 여행의 추억을 담은 책과 함께라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그렇게 아쉽지 않다.
이번 충주 여행에서도 어김없이 독립서점에 들렀다. 이번에 만난 책은 <사는 모양은 제각각>. 돌아온 일상이 무료하게 느껴질 때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긴다. 여행지에서 반쯤 읽다가 끼워둔 책갈피를 책상에 올려두고 책 속으로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
<사는 모양은 제각각>은 작가 보라차의 미얀마 여행기를 담은 책이다. 작가는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걷다가, 배고프면 먹고, 다시 걷고, 저녁이 되면 맥주 한잔하는 나날을 보낸다. (물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쓴다.) 작가는 낯선 자신을 만나기 위해 여행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여행을 떠난다.
내가 원하는 여행, 하지만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여행이 바로 이런 여행이다. 언제쯤 이렇게 훌쩍 떠날 수 있을까. 그 까마득한 시간을 기다리며 작가의 여행기로 대리 만족한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문장 하나를 옮겨 적는다.
"꼭 해야 하는 일 없이 게으른 시간을 보내는 법을 나는 베트남에서, 태국과 라오스에서 배웠다."
그렇다. 무엇인가 하지 않고 게으른시간을 보내는 법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머릿속을 핑퐁처럼 뛰어다니는 To do list. 누가 하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니고, 으름장을 놓으며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시간이 갈수록 초조하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읽을 책은 산더미, 해야 할 일은 넘쳐나고, 하고 싶은 일도 줄지어 서 있다. 돈도 벌고 싶고, 성공도 하고 싶고, 마음껏 놀고도 싶다. 머리는 분주한데 게으르기만 한 몸뚱이를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민다. 가만히 있지만 가만히 있어서 너무 불안하다.
하지만 모두 해야 하는 일일까? 우리는 꼭 무엇인가 해야 할까? 그냥 인생이라는 긴 시간 잘 때우면 충분하지 않나? 우리는 지구에 무엇인가 해내러 오지 않았다.만약 그렇다면 신이 나를 이토록무능하게보냈을 리 없다. 그냥 시간을 때우러 왔을 뿐. 무엇을 하며 때우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주어진 시간만큼 충실하게 때우면 되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게으름을 부려도 우리는 충분히 잘하고 있는것이다.시간을 잘 때우고 있으니까! 그러니 이 당연한 시간에 죄책감을 가지지 말자. 그래도 영 마음이 불편하다면 우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게으른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다 읽은 책을 잘 보이게 책장에 고이 끼워둔다. 이 책은 반짝반짝 빛을 내며 여행의 추억과 이 작은 깨달음을 간간히 전해줄 것이다. 오늘은 깨달음이 헛되지 않도록 꼭 빈둥빈둥 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