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자는 사이에 이불에 쉬를 쌌다.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아이가 일어나면 당황스러워 울고불고 난리를 칠 테니 쥐도 새도 모르게 치우기로 한다. 깨지 않게 조심조심 아이를 옮기고 젖은 이불더미를 치운다. 그리고 장롱에서 뽀송뽀송한 새 이불을 꺼내 깐다. 점점 완벽 범죄에가까워진다.
세탁기 앞에 수북한 이불 빨래를 쌓아두고 소파에 앉아 한숨 돌린다. 주위는 고요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 익숙함이 느껴진다.퍼즐이 맞춰지듯 불현듯 그때 그 일이 떠오른다.
아마도 내가 우리 아이보다 조금 더 컸을 때 일인 것 같다. 이불에 실수할 나이는 한참 지난 어느 날 밤. 축축한 촉감에 잠을 깼다. 그 축축함의 근원지는 바로 나. 속옷에서 잠옷을 넘어 이불까지 축축하게 적신 그것. 이불에 쉬를 싼 것이다.
실수를 깨달은 순간부터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쿵쾅거리는 소리에 누군가 잠에서 깨어 이 난감한 순간을 목격할 것만 같았다.( 이때 우리 네 식구는 모두 한 방에서 잤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까지 나만 비추었다. 부끄럽고 무서웠다. 아빠, 엄마의 화난 얼굴이 보름달보다 더 크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두려움에차마 눈도 뜨지 못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간절하게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아침이 되면 이불이 바싹 마르게 해 주세요. 제발요.' 말도 안 되는 소원을 염불처럼 외우던 나는 어느새 다시 잠이 들었다.
새벽 난리통 탓인지 늦잠을 잤다. 정신이 들자마자 다급하게 이불을 더듬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정말 이불이 뽀송뽀송 말라있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 내 간절함을 외면하지 않은 것이다. 분명 달님이 소원이 들어주신 것이다! 간밤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아침밥을 먹고 학교에 갔다. 밤사이 이불이 말랐다고 철석같이 믿다가 어쩌면 내가 실수를 한 게 꿈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편해졌고 그 일은 곧 없던 일처럼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 허무맹랑한 믿음에 헛웃음이 난다. 달빛이 소원이 들어주시기는 개뿔. 밤사이 이불이 마를 턱이 있나. 나보다 일찍 일어난 엄마가 깨끗한 이불을 깔고 새 옷으로 갈아입혀주셨을 것이다.그날 엄마의 분주했던 밤이 오늘 밤과 오버랩된다. 역시 나는 김이 풀풀 나는 냄비를 보고도 꼭 손을 대어봐야 뜨거운 걸 아는 미련한 인간이다.
새벽 어스름에 젖은 이불을 갈고 모른 척하셨을 엄마의 마음을 생각한다.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똑같을 그 따뜻하고 커다란 마음을 생각한다. 앞만 보고 걷는 내 뒤로 켜켜이 쌓인 아빠, 엄마의 사랑과 노고 없이 내가 어찌 오늘까지 건강한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을까. 그 길고, 깊고, 커다란 사랑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만져지지 않는다고 모른척하고 살 수 있을까.
늙어가는 아빠, 엄마 앞에서 혼자 잘났다고 내뱉은 날카로운 말들이 너무 죄송하다. 염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나 모르겠다. 아무리 멍청해서 그걸 몰랐을까 후회되는 밤이다. 그리고 그 후회가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인 밤이다. 아침에 되면 아빠, 엄마한테 전화한테 걸어야지. 그 따뜻한 목소리를 너무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