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활에 영 맞지 않는 INFP로 태어나 생존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실험, 연구 중이다. 이왕 태어난 거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목표 하나로 부단히 발버둥 친 덕에 이 모양 이 꼴로라도 버텼지 싶다. 대견한 나에게 귀여운 쌍따봉을 날린다. 앞으로도 더욱 애써주도록!
그렇게 터득한 삶의 기술 중 하나가 ‘최악 상상하기’다. 다가올 미지의 미래가 너무도 무겁게 느껴질 때, 불안이 극에 달해 차라리 초대형 운석이 떨어져 인류가 부지불식간에 멸종하기를 바랄 때,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내가 견딜 수 있는 최악의 현실을 상상한다. 그 최악의 미래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궁리하다 보면 거센 파도처럼 휘몰아치던 불안도 이성에 잠잠해지고 어둠과 함께 찾아온 졸음이 걱정마저 잠재워버린다. 현실과 꿈의 경계 어디쯤에서 ‘어떻게든 이 한 몸 건사하지 못하겠냐’는 막연한 안도감이 샘솟는다.
‘최악’ 레퍼토리 중에 하나는 ‘당장 해고를 당하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이다. 유년기의 한 페이지를 IMF 시절로 보낸 나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공포다. 더 이상 안정적인 월급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 없다면? 아르바이트 자리도 없을 정도로 나라 경제가 쑥대밭이 된다면?
수입이 없다면 생활비부터 줄여야 한다. 자동차는 유지비용이 많이 들고 ‘대중교통’이나 ‘걷기’로 대체 가능하기 때문에 1순위 처분 대상. 이 만약을 위해 걸어 다니는 일에 낯설어지지 않아야 한다. 지금부터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고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자. 운동도 할 겸.
나의 취미는 독서, 글쓰기, 그림 그리기.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 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도 거의 비용이 들지 않으니 참 다행이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지금 즐기는 것들을 평생토록 즐길 수 있다. 컴퓨터나 그리기용 아이패드가 고장 난다 해도 우리에게는 연필과 종이라는 클래식한 도구가 있다. (문구 덕후로서 앞으로 10년은 쓸 수 있는 종이와 연필이 이미 구비되어 있다.)
그다음은 의복비. 지금 있는 옷으로도 충분히 할머니가 될 때까지 입을 수 있다. 살만 찌지 않는다면 말이다. 근데 돈이 없으면 살이 찔 수도 없을 것 같으니 완벽한 인과 관계가 성립한다. 꽃무늬 원피스를 좋아하는 나의 취향은 예견된 것이 분명하다. 옷이 낡거나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든다면 이때가 바로 재봉틀 솜씨를 뽐낼 때다. 역시 사람은 무엇이든 배워두는 게 좋다. 혹시 누가 아는가? 비루한 재봉틀 솜씨로 소소한 부업이라도 할 수 있을지.
그리고 가장 큰 비용을 차지하는 주거비를 생각해 보자. 일단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자. 자연 가까이 사는 게 은퇴 후 계획이었으니 조금 앞 당겨졌을 뿐이다. 원래 시골 출신이니 적응할 것도 없다. 무엇이든 시작이 어려운데 덕분에 수월하게 시골 살이를 시작할 수 있겠다. 요즘은 지자체에서 빈집을 수리해 저렴한 비용으로 대여해 준다고 하던데 운이 좋으면 거의 공짜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골에는 일손이 부족하니, 일자리까지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 시골에 가면 텃밭을 일구어야지. 텃밭에서 직접 기른 농작물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 식비도 줄이고 이참에 몸도 튼튼해지겠다. 참새 방앗간 드나들 듯 다니던 카페에 못 가는 게 문제인데 이런! 이미 집에 커피머신이 있잖아! (역시 나는야 멋진 맥시멀리스트)
다만, 아쉬운 것은 여행을 못 가는 것이다. 그런데 뭐, 이것도 생각하기 나름이지. 여행이 꼭 캐리어 끌고 비행기 타야 여행인가. 늘 가던 길이 아니라 낯선 길을 걸으면 그게 여행이지. 새로운 책의 책장만 펼쳐도 여행이고, 어제 보던 풍경이 새로워 보이면 그것이 또 여행이고. 오히려 매일매일이 여행이 되지 않을까.
쓸데 있는 생각에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어느덧 고요한 밤이 찾아오고 노곤노곤해진다. 불안을 이어가기에는 침대에 대자로 뻗은 몸이 너무도 편안하다.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이 밤이 지나면 또 새로운 아침이 시작될 것이고 그 어떤 아침이 와도 어떻게든 살아질 것이다. 늘 그랬듯이. 폭삭 망해도 입에 풀칠은 하겠지. 폭삭 망해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어. 게다가 아직 폭삭 망하지도 않았다. 뭐야? 나 참 행복한 사람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