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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루 Oct 03. 2023

봄은 온다

걱정 마 봄은 와!


비가 오는 날에는 국숫집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햇살이 따스한 날에는 카페마다 각양각색의 파라솔들이 꽃처럼 활짝 피어나고요. 바람 부는 날에는 빵 굽는 냄새가 멀리까지 퍼져 나가니까. 요즘 빵 만드는 재미에 푹 빠진 마카롱 자매들이 신이 납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떡집의 연통에서 하얀 연기가 새벽부터 피어오르고 연말이 되면 케익 가게가 분주해집니다. 이렇게 우리는 계절도 날씨도 공평하게 나누며 이 작은 상가의 표정을 만들어 가요.


마카롱 가게 쇼케이스 속의 '토토로와 메이'


“검침이요!” 돋보기를 코끝까지 내려쓰고 파란 검침(수도, 전기) 노트를 든 관리소장님이 가가호호를 일일이 들르며 긴 복도를 절룩절룩 걸어오세요. 오래된 상가라 다양한 민원도 있고 그래서 상인들은 하소연할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 너털웃음으로 잘 넘기십니다. 그것도 소장님이 하실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시원한 국물의 우동을 드시고 싶지만 요즘 소화가 잘 안 돼서 여기서는 카레만 드십니다. 언젠가부터 저의 민원은 “왜 이렇게 손님이 없을까요?” 아버지 같은 소장님은 제가 어리광 부리듯 푸념을 늘어놓을 때마다 “걱정 마. 봄은 와!” 라며 너른 마음이 느껴지는 자상한 미소로 대답해 주십니다.


식당을 처음 해보는 저에게는 그 묵직한 한마디가 어찌나 든든한지, 소장님을 뵐 때마다 “소장님! 봄은 오긴 오나요?” 따지듯 괜히 투덜거립니다. “내 칠십 평생 어김없이 왔어. 그리고 자네 카레 맛있어!” 어느 날은 억지를 부리는 아이처럼 봄을 달라고 생떼를 씁니다. “이것 봐요! 손님도 봄도 안 오고 눈만 내리잖아요!” 소장님은 싸리비를 챙기시다가 하얀 하늘을 올려다보시더니 “이 눈은 겨울을 마저 보내려고 내리는 거야… 음. 곧 봄이 오겠군” 힝~한 저는 곁에서 말없이 쌓인 눈을 함께 쓸어요.


“이놈의 고장 난 다리. 수술을 하든지 해야지”라는 말씀을 하신 후 한동안 소장님의 책상은 비워져 있었습니다. 곧 오셔서 불쑥 “검침이오!” 라며 다시 돌아오시겠지. 그때는 더 징징거리며 봄 타령을 해야지. 소장님의 주머니를 뒤져봐야겠어. 어디 숨겨 놓으셨을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거지.


어른들의 걸음은 느려지고 아이들은 뛰기 시작합니다. 어느새 한 겨울의 해가 바뀌고, 드디어 언 땅이 녹으며 동면에서 깨어난 생명들이 분주하게 봄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숨어 있다가 마치 “지금이야!”라고 누가 신호를 보내서 달려오는 것처럼 이 낡은 상가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가게들도 겨울 먼지를 털어 내듯 봄맞이 청소를 하고, 겨우내 고심했던 신메뉴를 광고하는 새 배너를 내걸어요. 식당을 하는 사장님들은 갑자기 몰려드는 손님에 서로 밥을 빌려주고, 미처 준비하지 못한 거스름돈을 바꾸러 다니느라 바쁩니다. 저도 하루에 두 번씩 카레를 끓이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앞으로 전기와 수도의 계량기를 사진 찍어서 아래의 번호로 문자 보내 주세요” 어느 날 이런 메모지가 식당 출입문에 붙어 있었습니다. 저는 곧바로 관리사무실로 달려갔습니다. 소장님의 책상에서 중년의 남성 한 분이 무슨 일이냐며 인사를 하세요. 저는 그냥 아무 말없이 A4용지 10장을 얻어 들고 나와서는 마카롱 자매를 찾아갔습니다. “아, 왜 사장님께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까. 미안해요” 수술 후합병증으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며 마카롱 언니는 다시 눈시울이 붉어져요. 그리고 괜히 저에게 미안해하십니다.


긴 복도를 자꾸만 덤덤하게 뒤돌아봅니다. “검침이오!” 혼잣말처럼 작게 소리도 내보고요. 녹음이 드리워진 담장으로 햇살이 넓게 퍼져간 양지로 양지로 새가 또 새가, 새들이 모여듭니다. 완연한 봄. 하늘로 봄 마중이라도 가셨던 걸까요. 이렇게 봄만 왔습니다. 끝내 참으려 했던 눈물이 흘러요.


오늘의 첫 손님은 소장님. 평소 즐겨 앉으시던 빈자리에 따뜻한 국물의 우동 한 그릇을 올려 드렸습니다.


하늘의 소장님께 올린 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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