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관광을 마치고 다음 목적지인 피렌체로 떠나기 위해 걱정을 한 가득 안고 테르미니역에 왔다. 로마에 도착한 첫날,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로마 중앙역인 테르미니역에 왔을 때 엄청나게 많은 플랫폼을 보며 피렌체 가는 기차를 탈 승강장을 제때 찾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테르미니역의 플랫폼은 30개가 넘었다. 행선지가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엄청난 플랫폼을 보지 못했던 나에게는 문화충격이었다. 장차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거나 북한과 교류협력이 활발해지면 서울역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무사히 열차에 올랐다.
테르미니역을 떠난 열차는 2시간 남짓 걸려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노벨레 역에 도착했다. 인구가 50만쯤 되는 피렌체 역의 플랫폼도 20개는 족히 되어 보였다.
두오모 성당
20여 년 전 출장으로 피렌체에 처음 왔을 때 반나절 일정으로 두오모 성당, 베키오 궁 및 베키오 다리를 슬쩍 바라만 보고 지나쳤었다. 그때 지녔던 아쉬움을 이제는 제대로 풀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달려간 곳이 두오모 성당이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성당 중의 하나인 두오모 성당을 보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입장하려는 사람들이 만든 긴 줄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맨 먼저 죠또의 종탑에 올랐다. 어림잡아 700개가 넘는 계단을 헉헉거리며 올라 오니 피렌체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장관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올라오느라 흘린 땀을 시원한 바람에 날려 버렸다. 내려가는 것도 문제였다. 올라오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길을 비켜주느라 내려가는 시간보다 서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여행안내서에는 죠또의 종탑이나 두오모 성당의 코폴라 가운데 하나를 오르라고 쓰여 있었지만 둘 다 오르기로 했다. 또다시 700여 개의 계단을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꼭대기까지 오른 뒤 발코니로 나가 보니 종탑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피렌체 시내가 눈 앞에 펼쳐졌다. 감개가 무량했다. 오래전에 스치듯 지나간 도시를 이제 구석구석 살핀다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성당 안과 성당 앞에 따로 지어진 세례당까지 모두 둘러본 뒤에 땅거미가 질 무렵 숙소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목에 산 로렌초 성당과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이 있었다. 이 도시가 메디치 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건축물들이었다.
메디치 리카르디 궁의 화려한 회의장
다음날. 맨 먼저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을 찾았다. 메디치 가문의 첫 번째 궁전이었는데 지금은 메디치 가문과 관련된 박물관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르네상스를 이끈 메디치 가문이 시작된 이곳을 구석구석 꼼꼼히 살피며 그 기운을 온몸으로 받았다. 메디치 가문은 그 뒤 더 큰 궁전인 베키오 궁을 지은 데 이어 바로 옆에 우피치 궁도 지어 그들의 영화를 한껏 과시했다. 사실 르네상스 시대에 메디치 가문의 명성은 유럽의 웬만한 나라보다 높았고 영향력도 어지간한 나라를 능가했다.
산 로렌초 성당
그런 힘을 토대로 메디치 가문은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그리고 레오 11세 등 3명의 교황을 배출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세상에 거칠 것이 없던 그들은 자기네 영화를 뽐내며 가문의 성당인 산 로렌초 성당을 짓고, 바로 옆에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하여 메디치 예배당도 지었다. 산 로렌초 성당은 외벽을 마감하지 않은 것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교황 레오 10세는 미켈란젤로의 친구로 어린 시절 메디치 리카르디 궁에서 같이 자랐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피렌체에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나 관련 흔적이 유난히 많이 남아 있었다. 우리나라 홍대 입구처럼 젊은이의 거리라고 불리며 야경이 피렌체 최고라는 언덕의 이름도 미켈란젤로 광장이다. 우피치 궁은 우피치 미술관으로 바뀌어 로마의 바티칸 박물관과 보르게세 미술관,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과 더불어 미술학도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 되었다.
우피치 궁을 뒤로하고 베키오 다리로 향했다. 아내는 기대에 부푼 모습이었지만 난 오래전에 스치듯 지나쳤지만 봐 둔 게 있어서 아내의 가슴에서 바람을 조금 빼냈다. “소문난 잔치 먹을 게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베키오 다리 위는 인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으며 사진도 찍고, 사랑의 징표인 자물쇠도 걸며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지만 아내는 예상했던 대로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리 조치해 둔 덕에 허망해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만의 도시는 아니었다. 그들과 쌍벽을 이루던 피티 가문도 있었다.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한 루카 피티는 베키오 궁을 능가하는 피티 궁전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궁전 뒤에 보블리 정원도 조성했는데 이 정원은 오늘날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정원으로 명성을 높이고 있다. 메디치 가문을 이겨 보려고 능력을 넘어선 투자를 하던 피티 가문은 준공을 코 앞에 두고 루카 피티가 사망한 데 이어 사업실패로 말미암아 파산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피티 궁전은 메디치 가문에게 팔리고 말았다.
피티궁전
이 거대하고 호화스러운 궁전은 오늘날 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당초 우피치 미술관을 보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포기하는 바람에 아쉬웠는데 피티 미술관이 아쉬움을 달래 주었다. 복잡하지 않은 가운데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어느 여행자는 우피치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며 일부러 이곳을 찾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보블리 정원
보블리 정원과 그 주변까지 모두 둘러보고 나니 어느덧 시간이 오후 5시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오후 시간 대부분을 피티 궁전에서 보낸 것이다. 피티 궁전과 보블리 정원을 돌아보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피렌체 어디를 가도 넘쳐나던 한국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은 명성이 높은 곳만 찾아다니는 것만 같아서 조금은 아쉬웠다.
피티는 호화스러운 궁전을 지었지만 단 하루도 살아보지 못하고 라이벌 메디치에게 넘기고 말았다. 그랬던 메디치 가문도 1737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인생무상이라더니 피렌체를 대표하던 두 거대 가문이 모두 무너져 버린 것이다. 피티 궁전은 이 두 가문의 영욕의 역사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다.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정원 한쪽에 허리를 한껏 뒤로 젖힌 날씬한 청동 여인상이 있다. 그 모습이 마치 메디치 가문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꺾인 것처럼 여인의 허리도 꺾어질 듯 위태로워 보여 꺾이지 말라고 손으로 살짝 받쳐 주었다.
다음날 아침 피렌체를 떠나기에 앞서 메디치 가의 성당인 산 로렌초 성당에 갔지만 예배 중이라며 입장을 저지당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마지막으로 메디치의 기운을 한번 더 받아 부자가 되어 보려 했는데 무산되고 만 것이다. 하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피티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그나마 있던 한 줌 재산마저 날릴지도 모르지. 미련 없이 산 로렌초 성당을 떠나 베네치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