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세미 Oct 07. 2021

편도티켓의 여행

3. 도착하지 않은 캐리어

햇수로 6년차 직장인.

잘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던지기 까지 한 고민의 시간 6일.

퇴직금을 몽땅 들고 혼자서 떠날 유럽여행을 준비한 기간 6개월.

모아놓고 생각해보니 불길한 숫자 666이다.


그래서였을까. 내 캐리어가 실종됐다.


이곳은 한 밤의 프라하 공항.

천천히 움직이는 컨테이너벨트 위로 다양한 색상과 모양의 캐리어들이 하나 둘 줄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이집 앞에서 자신의 아이를 기다리는 학부모가 된 것처럼 근처를 서성이던 여행객들이 자신의 캐리어를 찾아 컨테이너벨트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내 아이는 언제쯤 나올까? 나 역시 펭귄이 그려진 택이 달린 나의 보라색 캐리어를 기다리며 휴대폰으로 시간을 살폈다. 11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각. 조금 더 늦으면 호텔까지 찾아가는 길이 무서워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결국 모든 캐리어가 사라질 때까지 나의 보라색 캐리어는 나타나지 않았다.


“캐리어가 도착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된 거죠?”

항공사 카운터를 찾아가 어플을 통해 영어로 번역된 문장을 보며 더듬더듬 물었다. 한국 사람이 애써 영어로 번역해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러시아어다. 다시 한 번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시큰둥한 표정의 항공사 직원은 여전히 러시아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몇 마디를 툭 던질 뿐이었다. 울고 싶었다. 캐리어안에는 여행경비와 옷, 두 달간의 여행에 필요한 생필품과 노트북, 휴대폰 충전기가 들어있었다. 캐리어를 찾지 못하면 여행은커녕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내 캐리어는 어딨죠?”

그때 누군가 불쑥 나타나 직원을 향해 물었다.

‘캐리어를 받지 못한 사람이 또 있나 봐!’

누군가의 불운이 이토록 반갑다니! 기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휙 고개를 돌려 본 곳에는 한 남자가 서있었다.

‘인도사람일까?’

실제 국적은 어디일지 모르지만. 남자는 조금 화가 난 표정으로 카운터의 직원에게 캐리어의 행방에 대해 물었고, 놀랍게도 직원은 “얼른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나도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대답했다.


직원이 캐리어의 행방을 찾아보는 동안 우리는 근처에 앉아 짧은 대화를 나눴다. 남자는 인도계지만 국적은 홍콩이며, 한국에 비즈니스를 하러 왔다가 나와 같은 프라하행 비행기를 탔고, 연착문제로 모스크바에서 급하게 환승을 하면서 우리 둘의 캐리어가 제때 도착하지 못한 거 같다고 말해줬다. 아주 친절하게도 번역 어플을 통해서 한국말로. 이 순간 그에겐 미안하지만 이 불운이 내게만 닥친 것이 아님에 하늘에 감사했다.


“죄송합니다. 비행기 연착문제로 캐리어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다음 비행 편으로 받아 호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이 끔찍했던 캐리어 실종사건은 다행히 해결이 됐다. 그는 밤이 늦었다며 택시를 잡아줬고, 다른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연락하라며 전화번호를 남겨주고  호텔로 떠나는 나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어줬다.


대가가 없는 친절을 받았다.

그와 나는 성별도, 나이도, 국적도 다르고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우리의 공통점이라고는 아닌 밤중에 공항에서 캐리어를 잃어버렸다는 것뿐이었다. 이 불운한 사고가 아니었다면 평생 한 번 마주칠 일 없는 인연이었을 것이다.


자정이 넘은 시각. 호텔에 도착해 사정을 얘기하니 갈아입을 수 있는 티셔츠를 주셨다. 남녀공용의 그 티셔츠는 사이즈가 엄청나게 커서 덩치 좋은 남자친구의 옷을 걸친 것처럼 넉넉했고 편했다. 보통 호텔시트는 하얀색인데 이곳은 특이하게 빨간색 시트와 이불이었다. 유럽은 난방시스템이 잘 되어 있지 않아 한국보다 좀 춥다고 하던데 마음이 흥분돼서 그런지 추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까슬까슬하고 시원한 빨간색 이불 위에 누워 고개를 돌려 호텔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 내리는 프라하의 시내가 보였다. 밤이라 가로등에 비친 모습이 전부였지만 확실히 지금껏 내가 쭉 보아온 한국의 풍경과는 달랐다. 문득 웃음이 삐져나왔다.


캐리어가 제때 도착하지 않아서.

인도계 홍콩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여행하는 동안 타볼 일 없을 거라 생각한 유럽 택시도 타봤다. 엄청 큰 기념 티셔츠도 생겼고, 여행 첫 날 아주 따뜻하고 다정한 기억을 선물 받았다. 뜻밖의 사고가 없었다면 평범하게 공항에 도착해 호텔로 들어와 잠에 들었을 것이다.


인생은 역시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것.

불운도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 것.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어떻게든 괜찮아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뜻밖의 사건이 행복한 기억을 선물해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밤이었다.

이전 02화 편도티켓의 여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