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잔혹한 농담
“오늘은 내 거북이가 죽었지 뭐야. 하나씩 죽어나가고 있어. 우리 가족이.”
농담이었다. 팩트였지만. 어쨌든 이건 듣는 이가 재밌으라고 한 내 나름의 블랙코미디였다.
이 농담의 시작은 이렇다. 초등학생일 무렵 아빠가 거북이 다섯 마리를 사왔다. (우리 집은 네 자매로 여섯 식구지만 이땐 막내가 태어나기 전이다.) 초등생의 검지 손가락정도로 작은 녹색의 거북이였다.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지만 나와 동생들은 가장 마음에 드는 거북이를 한 마리씩 골랐고, 각자 자신의 이름을 붙여줬다. 그렇게 다섯 마리의 거북이는 엄마, 아빠, 선화, 선정, 선미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아빠는 거북이가 오래 사는 동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거북이가 한 마리씩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거북이에 대한 기억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죽었을 때, 두 가지 뿐이다. 밥을 주거나 물을 갈아주거나 수조를 치워준 기억은 없다. 아마도 전혀 돌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오늘은 동생 거북이가 죽었는데, 며칠 뒤엔 아빠 거북이가 죽었고, 또 며칠 뒤엔 내 거북이가 죽었다. 그렇게 다섯 마리의 거북이가 모두 죽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내가 즐겨하는 농담이 되었다.
거북이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선 앵무새 두 마리, 햄스터 여러 마리, 토끼 한 마리도 죽어나갔다. 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이 죽음들 앞에서 나는 단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슬퍼하지도 않았다.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동물을 샀고, 같이 조금 놀다가 어느 날 죽었다. 그 이상 그 이하의 감정은 없었다.
그런 나였기에 거북이의 죽음 같은 농담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거겠지. 어른이 된 이후에도 종종 “어릴 때 거북이 다섯 마리를 키웠는데··· 우리 가족의 이름을 붙여줬지.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한 마리씩 죽어 나갔어.” 하고 납량특집 에피소드를 털어놓듯 이야기를 꺼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대체로 웃으며 들어줬다. 그러니 이 에피소드가 나의 농담 레퍼토리가 될 수 있었던 걸 거다.
한번이라도. 누군가가 내게 “어떻게 동물의 죽음을 웃음거리로 소비해?”라고 말해줬다면. 또는 “그 거북이들이 불쌍하지 않았어?”라고 물어줬다면. 그 농담을 멈출 수 있었을까. 거북이의 죽음이라는 농담이 잔혹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한참 뒤. 5년 8개월을 함께 산 고양이가 죽은 지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