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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세미 Oct 21. 2021

편도티켓의 여행

5. 너의 이름은

평생 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할 선에 꽃 화. 선화. 착한 꽃이라니. 꽃이 어떻게 착할 수 있단 말인가. 꽃에는 인격이 없다. 착함을 강요하는 듯한 선할 선자도 한 순간 피었다 곧 지고 마는 꽃이라는 화자도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기백이 느껴지는 용맹하고 강한 이름을 가지고 싶었다. 아니면 영어인 듯 들리지만 한글인 세련되고 예쁜 이름이라던가.

하지만 내 이름은 누군가에게 얘기해줄 때 선아로 제일 먼저 알아듣는 발음하기도 어려운 선화다. 매년 올해의 할 일에 ‘개명’을 적어두지만 막상 딱 떠오르는 마음에 드는 이름이 없어 미루고만 있는 중.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개명을 하고 말테다.


처음부터 고양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 고양이 이름은 단비, 아들 고양이 이름은 하루.

단비의 이름은 동생의 남자친구가 입양하기 전부터 지어져 있었고, 아들 고양이 하루는 동생이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다. 내가 데리고 있는 한 달 동안은 내 마음대로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고양이는 사람과 달리 법원에 개명신청을 할 필요도 없다. 그냥 달리 부르기만 하면 된다. 하루는 이름이 마음에 드니까 단비만 바꾸자. 고민 끝에 이름은 ‘하리’로 결정했다. 고민을 했다기엔 몇 시간 만에 정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하리, 하루. 이제야 좀 모자지간같이 느껴졌다. 아닌가? 남매 같은 이름인가. 상관없다. 예쁜 이름이기만 하면 됐다. 이건 순전히 고양이를 위한 개명이 아니라 나를 위한 개명이었다. 나는 가지지 못한 예쁜 이름을 너에게 선물할게. 라고 했지만 사실은 SNS에 예쁜 이름을 가진 예쁜 고양이 사진을 올리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졸지에 개명이 되어버린 하리는 아무리 불러도 쳐다보지 않는 고양이였다. 바꾼 이름이 마음에 안 드나? 싶어 본래 이름인 단비로 불러도 쳐다보지 않았다. 이름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바뀐 게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싶었지만 고양이와는 어떻게 해야 친해질 수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냥 뒀다. 


작업실은 2평정도의 주방공간과 5평 정도의 거실 겸 방이 있는 원룸형태였는데 주방과 방 사이에 유리 중문이 설치되어 있어서 처음엔 고양이들이 방으로 나오지 못하게 문을 닫아두었다. 고양이들도 딱히 나올 생각이 없는지 주방공간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화장실을 가고 둘이 꼭 붙어있었다.




며칠이 지날 동안 고양이는 주방에 나는 방에 서로 떨어진 채 각자의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건 고양이를 돌보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함께 지내는 것도 아니었다.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었다. 한 달 동안은 그래도 한 식구니까. 인터넷에 찾아보니 고양이와 친해지는 방법으로 ‘투명인간취급’을 하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유리중문을 열었다. 하리와 하루는 여전히 방으로 오지 않았다. 나는 인터넷에 적혀있는 대로 고양이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안 보이는 듯 다른 곳을 보며 주방에 들어가 곁을 서성였다. 하리가 누워있는 곳 옆으로 가서 쳐다보지 않고 밥을 먹었고, 하루가 쉬고 있는 곳 옆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렇게 또 며칠. 이렇게 하면 정말 친해지는 거 맞아? 하는 의심이 들 때쯤,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나의 종아리를 스윽 스치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깜짝 놀라 뻣뻣하게 굳어 있으니 다시 한 번 더 종아리를 스윽 스치고 지나간다. 커다래진 눈알만 또르르 굴려 책상 아래를 보니 하리가 풍성하고 긴 꼬리로 내 다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스윽 스치고 지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놀라고 신기해서 “하리야!” 하고 불렀더니 에메랄드빛의 녹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천천히 크게 뜬 눈을 깜빡하며 인사해주니, 저도 눈을 깜빡하며 인사를 받아준다. 첫 눈 맞춤이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 속 어딘가에서 벅찬 기분이 올라왔다. 드디어 누군가의 단비가 나의 하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고양이와 친해지는 데 1등공신은 역시 추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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