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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세미 Oct 14. 2021

편도티켓의 여행

4. 일단은 한 달만,

사직서와 나 홀로 유럽여행의 힘은 대단했다.

스트레스와 카페인으로만 이루어졌던 내 안에 행복하고 예쁜 여행의 기억들이 채워지니 세상이 이유 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거기에 나만의 작은 작업실까지 얻은 후론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마저 전부 예뻐 보였다.


“언니, 고양이 한 달만 데리고 있어볼래?”

기가 막힌 타이밍에 셋째 동생이 물었다. 셋째동생은 어릴 적부터 유독 동물을 좋아해서 집에 햄스터를 데려오기도 하고 토끼를 데려오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어릴 적 우리 집에서 죽어나간 동물들은 거의 셋째동생에 의해 집으로 들어온 것들이었던 셈이다. 그땐 동생도 어려서 동물을 좋아할 줄만 알지 보살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어릴 때의 난 동생이 커서 동물원 사육사가 될 줄 알았는데, 동생은 동물이 아닌 빵 반죽을 다루는 제빵사가 되었다. 좋아하는 것과 먹고 사는 것은 별개라는 걸 어른이 되면서 알았다.

“무슨 고양이?”

“내 남자친구가 키우는 고양인데···.”

동생의 말인 즉 남자친구가 해외에 한 달 동안 나가있게 됐는데 그 사이에 고양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것. 해외에서 돌아온 후에는 제주도 본가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본가에선 고양이를 절대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일단은 한 달만 데리고 있어보고, 그 다음에 키우고 싶으면 언니가 키우고. 못 키우겠으면 다른 데에 입양 보내야 할 것 같아. 어때? 한 달만 데리고 있어볼래?”

고양이를 키운다는 옵션은 내 인생에 없었다.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아기도 동물도 싫어하는 나니까. 게다가 오래 전 우리 집에 들어왔던 그 거북이들처럼 제대로 돌보지 못해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응. 일단은 한 달만.”


그때의 난 행복한 기운으로 충만한 상태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에 차있었고, 누구에게든 기꺼이 친절을 베풀 수 있을 만큼 자애로 똘똘 뭉쳐있었다. 게다가 평생 키울 필요도 없다. 한 달 정도만 마음씨 좋은 언니노릇을 하며 갈 곳 없는 고양이들을 데리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작업실도 생겼으니 대충 여기에 두면 되겠지.


며칠 뒤, 동생이 남자친구와 함께 고양이 두 마리를 작업실로 데리고 왔다.

고양이라니··· 문득 집 앞 계단에 앉아있던 길고양이도 생각났고, 여행지에서 종종 본 낯선 고양이들도 떠올랐다. 모두 다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하듯 본 게 전부다. 만져 본 적도 밥을 줘본 적도 가까이에서 눈을 마주쳐본 적도 없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왜 데리고 있겠다고 했지? 막상 현실로 닥치자 긴장이 돼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 기분 마치 입사를 지원한 회사의 압박면접을 앞둔 기분이랄까?

두근두근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준비가 됐다는 신호로 고개를 끄덕이자 동생이 고양이가 들어있는 케이지의 문을 열었다.


고양이 두 마리는 각각 색깔만 다르고 똑같은 모양의 케이지에 들어있었다. 짙은 갈색과 노란색의 케이지였다. 먼저 짙은 갈색 케이지의 문을 열었는데 고양이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와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다음으론 노란색 케이지의 문을 열었다. 이번엔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고양이가 뛰쳐나왔다. 옅은 갈색과 하얀 긴 털이 복슬복슬한 노르웨이 숲 고양이였다. 장모종의 고양이를 처음 본 나는 그 풍성하고 긴 털에, 생각보다 큰 고양이의 사이즈에 놀라 눈을 떼지 못했다. 동생 말로는 이 고양이가 엄마 고양이고, 아직 밖으로 나오지 못한 고양이가 아들 고양이라고 했다. 엄마 고양이가 먼저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냄새를 맡으며 어슬렁거리자 고개만 빼꼼 내밀고 밖의 동태를 살피던 아들 고양이도 드디어 케이지 밖으로 나왔다. 아들 고양이는 엄마 고양이와 다르게 짧고 짙은 갈색 털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고양이였다. 언뜻 봐서는 모자지간으로 보이지 않게 달랐지만 자세히 보니 얼굴이 똑같이 생겼다. 이렇게 고양이 얼굴을 자세히 본 적은 처음이었다.


엄마를 따라 밖에 나온 아들 고양이는 동생이 가방에서 사료를 꺼내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다시 케이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엄마 고양이는 산책을 하듯 느긋하게 작업실을 한 바퀴 삥 돌더니 한쪽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 자린 보일러 선이 시작되는 자리로 작업실에서 가장 따뜻한 자리였다. 똑똑한 고양이구나. 뜨끈한 자리에 눕는 걸 좋아하고.


“쟤 이름은 단비야. 나이는 7살.”

동생이 뜨끈한 곳에 누워 살며시 졸기까지 하는 엄마 고양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한 달만, 잘 지내보자. 단비를 보며 동생에게 배운 대로 눈을 크게 떴다 천천히 감아보았다. 그게 고양이에게 건네는 인사법이라고 했다. 나의 인사를 받은 단비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훽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마저 도도하고 예뻐 보였던 건 고양이가 진짜 예뻐서인지 세상이 다 예뻐 보이는 내 마음 탓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에 고양이가 찾아왔다.


2015년 11월 13일, 처음 만난 날의 하리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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