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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세미 Sep 30. 2021

편도티켓의 여행

2. 아기도 싫고요, 강아지도 싫어요.

“아기 좋아하세요? 강아지나.”

“아니요. 아기도 싫고요, 강아지도 싫어요.”


소개팅남이 물었고 솔직히 대답했다. 이 대답으로 호감도가 많이 깎일 것임을 직감했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상관없었다. 제일 싫어하는 질문이었다. 마치 아기를 좋아하지 않거나 강아지를 싫어하면 나쁜 사람처럼 느껴지는 질문이라고 느껴졌으니까.  아기와 강아지를 좋아해야 상냥하고 따뜻한 사람인 건가? 왜? 어쩐지 삐딱해진 기분이 들어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소개팅남과는 카페 앞에서 곧바로 헤어졌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지만 상대도 나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럼 연락드릴게요.”라는 공허한 거짓말만 남긴 채 우리는 서로의 반대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아마도 이 사람과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는 그의 삶을 나는 나의 삶을 살겠지. 오늘은 매운 거나 먹자.


컵라면을 사기 위해 들른 동네 편의점에서 장난감이 들어있는 초콜릿을 사달라고 울고불고 떼를 쓰는 어린 아이를 보면서,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난데없이 왕왕 짖어대는 강아지를 보면서, 역시 나는 애도 동물도 싫다는 생각을 했다. 




집 근처의 골목길은 밤이 되면 지나가기가 무서웠다. 스릴러 영화나 드라마 속 범죄는 늘 다세대골목 주택가에서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소개팅 하지 말고 집에 일찍 들어가서 밥 먹고 잠이나 잘 걸. 아무도 없지만 누군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지는 낡고 좁은 골목길을 어깨에 짊어진 가방끈을 꽉 붙들고 빠르게 걸었다. 오랜만에 신은 구두 때문에 발이 아파왔다. 바로 코앞에 우리 집이 보였다. 오늘도 범죄 없이 집에 잘 도착했다. 하는 안도감이 밀려들던 차 나는 기겁을 하며 멈춰 섰다.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 집 앞 계단에 길고양이 세 마리가 칸칸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나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2층짜리 다세대주택이었다. 주인할머니는 1층에 살고, 우리 가족은 2층에 세를 들어 살았다. 집에는 정문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 쪽문이 있었는데, 정문은 주인세대만 사용하고, 반지하 세대와 우리가족은 쪽문만 사용했다. 쪽문은 처음 이사 오던 날부터 망가져 닫히지 않았다. 주인세대가 쓰지 않는 문이니 고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닫히지 않는 쪽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었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는 무방비상태였다. 거기에 길고양이가 포함되어있을 줄은 몰랐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한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가 각각 한 칸씩을 차지하고 앉아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건지. 발도 아프고, 배고 고프고, 빨리 들어가 오늘의 이 거지같은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길고양이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다가가서 쫓아내자니 무섭고, 무시하고 피해서 올라가기엔 계단이 좁았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집 앞 계단에 고양이가 있어! 한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야!”


전화를 끊고, 몇 초 뒤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는 빗자루를 들고 나왔지만 허무하게도 문이 열림과 동시에 길고양이 세 마리는 후다닥 저마다 계단 밖으로 껑충 뛰어내려와 사라졌다. 현관문소리에 깜짝 놀란 것처럼 보였다. 너희들도 무서워하고 있었구나. 생각해보면 길고양이는 사람을 잡아먹을 수 없다. 사람은 길고양이를 잡아먹을  수 있고. 무서워해야할 건 길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컵라면에 밥까지 야무지게 말아먹고, 빨갛게 까져버린 뒤꿈치에 데일밴드를 붙이고 포근한 침대에 풀썩 누워 생각했다. 아까 그 고양이들은 어디서 잘까? 집은 있을까? 비록 세 들어 사는 오래되고 좁은 다세대 주택이라도 몸 누일 집이 있다는 건 얼마나 소중한 것일까. 무서워하지 말고 슈퍼에 가서 참치캔이라도 사다 줄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이 들다가 다시 한 번 오늘의 질문에 대해 떠올렸다.


나는 왜 아기도 강아지도 싫은 걸까. 사실은 아기와 강아지가 싫은 게 아니다. 어떤 존재를 돌본다는 게 싫은 거다. 나만 바라보고, 나의 손길이 필요한 존재는 부담스럽고 귀찮다. 나는 지금 이렇게 퇴근을 하고 소개팅을 하고 밥을 먹고 다음날이면 또 아침 일찍 눈을 떠 출근을 하며 열심히 인생을 사는 것조차 숨이 막히게 벅차다. 이런 인생에 신경 써야 할 뭔가를 더 추가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참치캔을 사다주지 않길 잘했다. 한 번 챙겨주면 또 찾아왔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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