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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바다 Apr 07. 2021

내가 일을 하는 이유


내가 일을 하는 이유를 이야기하려면,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부터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편집자다. 살면서 내 일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야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내가 대단한 기획자나 편집자라면 왜 이 일을 하냐는 인터뷰 요청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니까. 예전에 소개팅을 할 때 종종 내 직업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편집자는… 책을 쓰나요?” 그럴 때는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야 한다. 보통 이렇게 운을 뗀다. “책을 쓰는 것은 아니고요….”      




편집자는 책을 쓰는 것은 아니고, 책을 만드는 직업이다. 드라마 PD를 생각하면 편하다. 잘나가는 PD처럼 막강한 권한을 갖지는 못하지만, 책 한 권에 대해서라면 분명 편집자는 큰 권한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편집자는 어떤 콘셉트의 도서를 만들고 싶은지 기획하고, 그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훌륭한 작가를 찾는다. 작가를 만나 기획에 대해 설득하고, 어떻게 하면 좋은 책이 나올 수 있을지 함께 치열하게 고민한다. 작가가 집필을 허락하면 그때부터 기다린다. (참고로 외서는 이 과정이 생략된다. 해외 어느 나라에서 편집자가 이러한 고민을 통해 만든 책을 가져와서 번역을 의뢰한다.) 반년 뒤, 혹은 일 년 뒤 작가의 글이 도착하면 편집자는 작가의 글이 독자에게 더욱 잘 읽힐 수 있도록 윤문과 교정교열을 진행한다. 동시에 어떤 디자이너와 작업하며 책꼴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본다. 디자이너와 본문·표지 디자인을 상의하고, 작가에게도 의견을 묻는다. 마지막 즈음에는 가장 중요한 관문인 제목, 표지 카피 정하는 과정을 ‘해내야 한다’. 책의 표지가 하나의 광고 아니겠는가. 매력적으로 써야 한 명의 독자라도 이 책을 더 읽을 것이다. 지금 내가 만드는 책이 의미 있는 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면, 편집자는 단 한 명의 독자에게라도 더 이 책이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미 없다는 판단이 들었어도 의미 있는 책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그 방법은 사실 나도 잘 모른다.) 헐! 다 적고 나니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설명을 길게 늘여 놓은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사실 일을 하면서 정말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를 떠올려 보려고 했다. 그럼 내가 일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불행하게도 나에겐 타인에게 즐겁게 읽힐 만한 에피소드가 없었다. 내가 좀 대단한 편집자였다면 좋을 텐데. 글을 매일같이 다루는 나에게 글감이 없다. 

그저 책을 만들던 순간순간을 떠올려 본다. 여러 가지 약의 쓰임과 기전에 대해 다룬 책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반 약사가 되어서 약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들에게 줄줄이 설명을 늘어놓았다. IS 성노예에서 가까스로 탈출해서 인권 운동가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거듭난 여성의 글을 편집할 때, 나는 마치 긴 터널을 걷는 것 같았다. 책을 만드는 내내 우울하고 답답했다. 아우슈비츠에서 못된 짓을 일삼던 한 약사의 일생을 다룬 글을 편집했을 때, 나는 이 책이 잘 팔리지 않으리라 직감했다. 하지만 제발 독자 한 명에게 더 읽히길 바라면서 전화통을 붙잡고 디자인 실장님께 하소연했다. ‘제가 왜 이 책을 기획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제발 한 권이라도 더 팔고 싶습니다!’ 

원고가 오고 나서 출간까지는 보통 3개월 정도가 걸리는데, 이 기간 동안 나는 강제로라도 원고와 사랑에 빠져야 했다. 그 사랑은 보도자료를 쓸 때 극에 달해서 ‘내가 이 책을 이렇게까지 사랑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원고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책을 만들 수 없을 것 같다.      




일을 하는 이유는 (닥치고) 돈을 위해서고, 글을 쓰면서 나는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를 알아낸 듯하다. 나에겐 아직까지 내가 만들어 낼 책과 사랑에 빠질 기운이 남아 있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데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크리에이티브한 기획을 고민하고, 내성적인 성격인데 작가를 만나서 소통하느라 노력하고, 원고를 받고 장점을 찾아내서 극대화하고, 누가 봐도 끌릴 만한 카피가 무엇인지 꿈에서도 생각해 보고, 그렇게 책과 사랑에 빠질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다. 

나는 오늘도 그 힘으로 책을 만드는 일을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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