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복숭아 쥬스

by 피어라

더운 여름날이었고, 아마 조금 늦은 저녁 이었을 거다. 엄마는 등을 보인 채 싱크대 앞에 서 계셨다. 뒷모습만으로도 복숭아를 씻는 엄마의 분주한 손놀림을 느낄 수 있었다. 싱크대 위에 차곡차곡 쌓이는 복숭아들은 살짝 부딪히고 어딘가 색이 변해있었다. 여름마다 엄마는 시장에서 싼 가격에 떨이로 파는 하품 복숭아들을 사오시곤 했다. 그렇게 양손 가득 복숭아봉지를 들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저녁도 안 드시고 복숭아 손질부터 했다.



부드럽게 잘 익은 복숭아를 깨끗이 씻어 하나하나 정성껏 껍질을 벗겨내고 나면 이번에는 플라스틱 강판을 꺼낸다. 그때쯤이면 좁은 집안에 복숭아 향이 가득차서 두 살 세 살 터울의 삼남매는 조로록 방에서 나와 복숭아가 먹고 싶어 꼴딱거린다. 하루종일 시장에서 바쁘고 힘든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피곤한 엄마는 마지막 힘을 짜내 팔을 움직이며 강판에 부드러운 복숭아 과육이 으깨지도록 갈았다. 엄마의 팔이 힘차게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둥그렇던 복숭아는 납작해져갔고, 집 안에는 복숭아 들큰한 향이 진동을 했다. 막내동생은 까치발을 하고선 싱크대 위로 간신히 고개를 내밀며 바닥에 떨어지는 과육을 노리기도 했고, 조금 큰 동생과 나는 과육이 조금 붙은 갈아내고 남은 씨를 갈비 뜯듯 서로 먹겠다고 엄마 곁으로 다가서기도 했다.



강판에서 갈리며 그릇에 떨어진 복숭아 과육. 강판 뾰족한 홈마다 남아있는 과육까지 숟가락으로 닥닥 긁고나면 갈아낸 복숭아가 큰 대접으로 하나 가득 나왔다. 이번엔 시골에서 보내주신 꿀단지가 등장할 차례다. 큰 숟가락으로 듬뿍 떠서 걸쭉하니 그릇에 넣고 휘휘 저어주면 엄마의 특제 복숭아 주스가 완성된다.



하나하나 손으로 갈고 꿀을 듬뿍 넣어 만든 엄마의 복숭아주스는 꿀의 단맛과 조금 멍든 과일의 시금한 맛이 섞여 달착지근하면서 약간 무른 맛이었다. 가끔은 그 주스에 얼음을 넣어 시원하게 먹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 날이면 얼음이 녹으면서 걸쭉한 주스가 더 부드러워져서 일부러 얼음을 녹여 마시기도 했다.



그때 그 복숭아 주스는 엄마 없이 기다리던 긴 낮 시간에 대한 달콤한 보상이었고, 고단한 일상을 날려버리는 엄마의 사랑이자 반짝반짝 빛나는 행복의 맛이었으며 가장 큰 호사였다.



여름 내내 팔뚝이 아프도록 갈아대던 복숭아 주스를 엄마는 한 번도 자신의 몫으로 만들어 드신 적이 없었다. 셋이 꼭 같은 양으로 컵에 따라주고 그릇에 남은 복숭아를 손가락으로 훑어 입에 넣는 것이 겨우 엄마 몫이었다. 지금도 여름이면 친정 냉장고엔 여기저기 흠집 있는 복숭아가 들어있지만, 아직도 그건 엄마 몫이 아니라 가끔씩 들리는 손주들 몫이다.



내년 여름에는 크고 싱싱한, 상하거나 무른 데 없는 온전한 복숭아를 사다가 엄마에게 갈아드려볼까? 컵 하나 가득 꿀을 듬뿍 넣고 휘휘 저어 늙은 할미 드시라고 예쁜 그릇에 받쳐서 내가고 싶다. 후루룩 소리를 내며 한 컵 다 먹고 나면 배가 부를 정도로 많이 갈아드려야지. 더위 따위 싹 잊을 만큼 시원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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