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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Sep 26. 2023

받쓰의 추억

받아쓰기와 피터팬

오늘은 화요일, 우리 반 아가들과 받아쓰기를 하는 날이다. 옛날처럼 점수를 공개하는 것도 아니고, 받아쓰기 결과를 가정으로 통지하는 것도 아닌데도, 9살 어린이들은 받아쓰기 본다고 하면 괴성을 지르며 환호(!!!)한다. 무언가 어린아이가 본능적으로 파충류를 두려워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시험도 없는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맞고 틀리고를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서 오는 긴장감일까? 혹은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는데서 오는 경쟁심이나 자존심? 아니면 모두 다 뒤섞인 그 어떤 마음이겠지. 나도 그랬었다.



진짜 진짜 까마득한 옛날에, 국민학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2학기 쯤이었나 전학을 갔었다. 낯선 학교, 낯선 교실, 낯선 선생님과 친구들. 아직 어색하기만 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이 어딘지 찾지 못해서 한참 헤매느라 쉬는 시간 10분을 다 써버렸다. 서둘러 교실로 돌아오니 이미 받아쓰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전학생으로 받은 출석번호사 70번하고도 뒷 자리였으니 오죽 애들이 많았을까. 그 중에 하나 빠졌어도 티도 안 났을거다. 그러니 선생님도 그냥 수업을 시작하셨을테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아 공책을 꺼냈다. 번호는 이미 5번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면 거기서 부터 받아 적으면 됐을것을....1학년 꼬맹이는 1번부터 적어야 하는 줄 알고 옆 짝한테 1번이 뭐냐고 조그맣게 물었다.


"1번 뭐야?"


하필 내 짝꿍은 잘난 척 대마왕 반 최고 인기남이었고, 갓 전학 온 꾀죄죄한 여자아이에게 친절을 베풀만큼 젠틀하지는 않았다. 다급해진 나는 혹시나 못들었을까 싶어 다시 한 번 물었다.


"1번이 뭐야?"


짝궁은 대놓고 무시 모드에 돌입했고, 나는 아무 것도 못 적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급기야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서러움과 불안함에 흐르는 눈물을 닦는 동안 선생님은 가차없이 10번 문장을 부르셨다. 


결국 나는 그 받아쓰기에서 빵점, 0점을 받았다. 

내 평생 유일한 0점의 기억이다.


받아본 공책에 빨간색연필로 그려진 커다란 동그라미를 본 순간 부끄러움 보다 속상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나쁜 짝, 한 번 불러주지 그게 뭐 어렵다고 못됐어, 못적은 건 그냥 두고 5번부터라도 적을걸, 원망과 후회가 뒤섞여서 얼른 종이를 집어넣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마, 부모님께 보여드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딱히 혼난 기억이 없으니까.


이 기억 때문인지 받아쓰기 시험에 엄할 수가 없다. 띄어쓰기나 문장부호 쯤이야 틀리면 어떤가 싶고, 아이들에게도 받아쓰기 점수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고 말한다. 틀렸다고 내 인생에 금가는 거 아니고, 못 맞췄다고 다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많이 맞아서 기분 좋으면 그걸고 족하고, 연습한 만큼 성취를 거두면 보람을 느끼고 만족하면 된다. (내가 이렇게 물러서 내 아들도 성적이 그 모냥이인 것 같.....;;;)


아직 '짧은' 인지, '짫은' 인지, '짤븐'인지가 중요한 세상에 사는 아이들을 보면, 나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생명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맨 인 블랙에서 나올 법한 작은 수정구슬만한 행성에 사는 외계인들 같기도 하고, 네버랜드에 사는 피터와 친구들 같기도 하다.  이 자그만 피터팬들은 모두 언젠가 네버랜드를 떠나야 한다. 세상이 넓어지는 만큼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선생님이 있는 것이고, 나는 오늘도 열심히 받아쓰기 채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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