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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Jun 01. 2024

무색무취에는 다정함이 없다

얼마 전부터 교문을 지날 때마다 은근하고 부드러운 향을 느꼈다. 바쁜 걸음을 돌아세울 정도로 인상적인 향이라 멈춰서 찾아보았다. 겨울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꽃들이 한가득 펴서는 존재감이 가득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치자보다 달콤하고 백합보다 여린 은은한 향이었다. 하얗고 노란 색깔도 곱고 모양도 독특한 것이 신기해서 검색해보니 인동초라는 꽃이란다.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라는데 여직 모르고 있었다니. 알고나니 그때부터 인동초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걸어다니면서 스치듯 향을 느끼고, 하얗고 노란색 꽃을 볼때마다 고개를 돌려 모양을 확인했다. 올 봄, 어딘가 품위가 느껴지는 이름을 지닌 인동초의 색과 향을 그렇게 마음에 담게 되었다.


오후에 함께 근무하고 있는 선생님과 잠시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선생님이 대화 중에 짧게 사별한 부인에 대해 말을 꺼내셨다. 사무친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일거라 짐작하고 고개를 숙였는데, 꺼낸 이야기는 조금 의외였다. 먼저 간 그 사람은 한 마디로 '무색무취'였다고했다.


무색무취인 사람, 모든 것을 다 자신에게 맞춘 사람, 어떤 색으로도 향으로도 남지 않은 사람. 함께 했던 삶에야 부부만 아는 애정이 사이사이에 가득 들어있었겠지만, 그 목소리에서 내가 느꼈던 건 회한도 애정도, 추억도 아니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아쉬움과 의아함이었다. 내게 모든 것을 맞췄던 존재가 사라진 데 대한 아쉬움과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은 의아함말이다.


나는 돌아가신 분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만나본 적도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으니 당연히 어떤 향과 색을 지녔던 사람인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 분이 남편을 정말 깊이 사랑해서, 남편의 뜻을 최대한 존중해서 자신의 향과 색을 드러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 방식의 사랑도 있을테니까. 하지만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내 남편이 나를 '무색무취'로 기억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남고 싶지 않다. 가장 가까웠던 아내를 무색무취라고 평가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관심했디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말은 아닐까. 매일 마시던 카누인데, 이상하게 텁텁하고 씁쓸했다.  


20년차 에디터 최혜진은 그의 책 [에디토리얼 씽킹]에서 선배 편집자로부터 '야마가 뭐냐?'라는 물음을 배웠다고 썼다. 일본어 그대로 '산'이라는 뜻의 야마는 그 이름처럼 뾰족한 무엇, 차별화된 지점에 대한 은어다. 저자의 말처럼 요즘 세대에게는 아마 '엣지'라는 말이 더 익숙하겠지만. 야마건 엣지건 '뾰족하다'는 것은 결국 나를 나답게 만드는 개성이라는 것이고 나를 드러내는 이 고유한 개성이야말로 나만의 색과 향일 것이다.


관심 혹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사람이 지닌 색과 향을 구별할 수 있다. 나를 향한 다정함을 지닌 사람이 내가 지닌 색과 향을 알아챌 수 있겠지. 내가 지닌 색과 향이 곱거나 아름답지 않고, 심지어 조금 불쾌할 수도 있더라도 말이다.

어떠한 사람이라고 누군가 말할 수 있는 나. 존재감이나 개성, 혹은 정체성이라는 말로 정의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색과 향을 지닌 사람이고 싶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나를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무색무취에는 어떠한 다정함도 들어있지 않다.  





후기 -

바람이 솔솔 부는 주말 오후, 거실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있는 남편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보, 나는 무슨 색일까?" 1초도 안되어 답변이 돌아왔다. "똥색.", "나를 냄새로 표현한다면 어떤 냄새인거 같아?","정수리냄새" 대답을 하고서 남편은 좋다고 낄낄대며 웃었다. 저 아저씨를 품어주다보니 당연히 내가 똥색깔로 변할 밖에 없지. "너랑 살아서 내가 똥색이다." 메롱을 열번 하방으로 들어왔다. 적어도 무색무취란 말은 안 들었으니 다행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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