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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May 25. 2024

옷 사러 가는 84세 할아버지

"느이 아버지 뱀띠라 맨날 허물벗어대싸잖아. 여즉 옷을 그르케 사댄다."


팔순 넘긴 친정엄마가 죽을 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으면서 자꾸 옷을 산다며 딸한테 아빠 흉을 보신다. 자기는 모르는 새 옷을 어디서 자꾸 구해서 입고 다니는게 보기 싫고, 자기 옷장 정리만 깔끔하게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노인네가 야하게 청바지를 입는다고 못마땅해하신다. 자기만 챙기고 엄마 옷은 한 번도 안 산것도 괘씸하시다.


젊은 시절 친정 아버지는 어린 딸아이 눈에도 미남이었다. 같이 다니면 언제나 사람들 눈에 띄었고, 나 역시 멋지고 잘생긴 아빠가 자랑스럽고 좋았다. 그 시절 분들치고 키도 크시고 훤칠하셔서 어릴때부터 '아빠가 미남이시네'라는 말을 곧잘 들었다. 아, 그 뒤에 생략된 말이 '아빠는 잘 생겼는데 딸은...'이라는 말이라는 건 아주 한참 뒤에 알았다. 그 좋은 얼굴 좀 나눠주면 좋을텐데, 애석하게도 아빠는 나한테 자기 얼굴의 장점을 하나도 물려주지 않으셨다. 원망은 하지 않는다. 이미 이 얼굴로 반백 년을 살았다.


뱀띠라서 옷과 패션을 좋아하는거라는 엄마의 주장을 뒷받침하듯, 아버지는 항상 깔끔하게 옷을 챙겨입으셨다. 우리 집에서는 드라마처럼 아내가 남편 옷을 챙겨주거나 입을 옷을 골라주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 스스로 다림질도 하셨고, 자기가 입을 옷은 자기가 선택해서 입으셨다. 내 기억에 예전에는 무난하고 단정한 것을 좋아하셨는데, 할아버지가 되시면서는 오히려 색도 화사하고 어딘가 독특한 포인트가 있는 옷을 좋아하셨다.


입고 싶은 취향도 있고, 무엇보다 이것 저것 맞춰가며 옷입는 걸 좋아하시지만, 돈은 없으셔서 새 옷을 척척 사지는 못하신다. 사는게 빠듯한 자식들이 철마다 백화점에 모시고 가서 사드리지도 못하고. 그런데도 아버지는 어떻게 매번 못보던 옷을 입으시는걸까?


아버지의 비밀은 바로 중고옷가게였다. 쇼핑센터 특유의 혼잡함과 번잡스러움도 없고, 자식들한테 옷사달라고 기대지 않아도 되고, 있는 돈으로 소소하게 계절마다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기에 적당한 곳, 잘 고르면 만 원 한 장으로도 살 수 있는 곳, 바로 친정 근처 '아름다운 가게'다.


작년 겨우내 편히 입으시던 겨울 솜점퍼도 거기서 사셨고, 바지나 티셔츠, 점퍼도 사셨다. 좋은 옷이야 자식들이 번씩 사가지만 옷을 고르는 재미를 포기할 없었나보다. 여든 넷의 아버지는 봄에도 엄마 표현에 따르면 '야시꾸리한' 웃옷을 하나 사셔서 입고 다니셨다. 가끔 시장 매장에 생기는 옷가게서도 젊은 엄마들 틈에 껴서 무더기를 헤치고 낚시질을 하신다고 한다. 월척을 낚으시면 딸들한테 자랑도 하시고.


노인에게 새 옷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 딸이, 사위가, 며느리가, 아들이 사 줬다고 자랑하기 위한 도구일 수도 있고, 자식에게 배려와 관심을 받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여전히 가꾸고 싶은 자신에 대한 확신의 의미일 수도 있을거라 생각한다. 나이들어갈수록 연하고 부드러운 것, 새 것에 눈길이 간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이 따라가고 새 순을 보면 웃음이 난다. 낡고 오래된 것을 아끼는 것 만큼,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된다. 옷에 대해서도 비슷하지 않을까?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애들 옷을 살 때는 몸에 맞는 옷을 사는 게 아까웠다. 쑥쑥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서는 내년 여름에는 못 입힐텐데, 그세 자라면 물려줄 동생도 없는데 굳이 비싼 거 살 필요 있나 싶기도 했다. 새 옷 사기 아까워 크고 헐렁한 옷 줄여서 폼 안 나게 입히기도 했지만, 꼭 맞는 옷 예쁘게 입히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사서 짧게 입히면 또 후회하긴 했지만 잘 차려입힌 아이를 보며 그때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느끼기도 했다.


아버지도 비슷하신게 아닐까싶다. 다음 계절에도 입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보다, 지금 내게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싶은 마음이 더 크실 것 같다. 아버지에게 옷을 산다는 것은 지금을 열심히 살고 있다는 의미일거고, 아직 더 살 수 있다는 희망이며, 오늘을 사는 행복인 거다. 그러고 보니 새옷 좋아하는 아빠를 흉보시지만 사실 엄마도  새 옷을 가져다 드리면 엄청 좋아라 하신다. 요즘 날씨에 입을 옷이 필요했는데 잘 됐다느니, 교회 갈 때 입을 게 마땅찮았다느니 하시면서.


그래, 여든 넷, 옷을 사기 좋은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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