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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May 18. 2024

입술에 지옥문이 달린 남자보고 다정하다니

결혼하고 5년 정도, 아직 첫 애가 어릴 때 내가 남편에게 붙인 별명은 '간이 없는 남자'였다. 간이 배 밖으로 나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고. 남편은 지나치게 솔직하고 타인에게 공감을 잘 못하는 성향이라 아무렇지 않게 상처되는 말을 곧잘했다. (연애를 못한 이유가 있었다. )신혼시절에는 왜 저러는지 기가막히고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겁도 없고 눈치도 없는 남편이 했던 말들을 직장에서 들려주면 사방에서 '어머어머'하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나중에는 입술에 지옥문이 달렸냐는 질문도 받아봤다.


그로부터 십오 년 쯤 흐른 2024년. 여전히 우리 남편은 내일은 없는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산다. 이제는 'T발 C야?' 하는 우스갯소리로 넘어가지만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꼭 남편에게 집고 넘어간다.


얼마전 비내리는 휴일에 네 식구가 산책을 나섰다. 평소 걷는 걸 싫어하고 귀찮아하지만, 남편과 한 우산을 쓰고 걷다보니 목적지까지 즐겁게 걸었다. 살짝 들뜬 기분으로 우산을 들고 있는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같이 걸으니까 금방 왔네. 힘든 줄도 몰랐어."

"내리막길이라 그래"

앞만 보고 말하는 저 남자. 아 네.


그보다 전에는 설겆이를 하는데 갑자기 손에 쥐고 있던 접시가 부러지듯이 깨졌다. 쿠키도 아닌데 똑 반으로 나뉘어서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까지 질렀다. "어, 접시가 깨졌어, 어떡해." 거실에 있던 큰 아들은 '엄마 괜찮아?'하고 물었고 동시에 남편은 '무슨 접시야?'하고 물었다. 아, 네네네.


이런 남편인데 다른 사람 눈에는 다정하게 보이기도 하나보다. 다정이라니, 어딜봐서?


지난 주, 볼일을 본 후 저녁을 먹고 들어오던 날이었다. 운전은 남편이 하고, 보글보글 김치짜글이에 스팸과 돈까스를 추가로 시켰으니, 막걸리가 절로 땡겼다. 지평막걸리 한 병을 시켜 나 혼자 마셨다. 남편이 잔에 가득 따라준 막걸리와 칼칼한 김치짜글이를 곁들여 먹다보니 한 병을 금새 다 비웠다. 기분좋게 알딸딸해져서 계산하러 일어섰다. 카드를 내미는 내게 사장님이 고개를 숙이고 뭐라고 소근거리셨다.

"남편이 엄청 다정하네."

"다정이요?"

"그럼, 지금도 가방 챙겨주잖아. 아까 보니까 술도 따라주던데. 아유 진짜 다정해."

남편쪽을 바라보며 비밀 얘기하듯 나한테 은근히 건네시는 사장님에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 제가 계산하잖아요."


'입술에 지옥문이 달린 남자'라는 별명을 지닌 남자에게 다정하다는 말이 맞는건지 잘 모르겠다. 부인에게 술을 따라주고 부인 가방을 들어주면 다정해보이는걸까? 사장님은 타인을 잘 챙겨주는 사람을 다정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 하다. 나의 이익보다 타인의 편리를 위해 내 몸과 시간을 쓰는 사람이라면 다정한 사람이 맞겠지. 하지만 마음과 말도 함께 써야 진짜 다정한 것 아닐까? 혹시 '다정한 사람'과' 다정한 남편'은 기준이 다른걸까? 다정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건지, 남편과 같이 소주 한 병 마시며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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