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간다
글을 쓰려다 단어가 생각이 안 났다. 물건을 잃어버린 것은 ‘분실’이라고 하는데 사람을 잃어버리면 뭐라고 하나. 없어진 사람은 ‘실종되었다’고 하는데 내가 누군가를 잃어버리면 그건 뭘까. 분실? 유실? 상실?
사전을 뒤지며 ‘분실’의 한자가 ‘어지러울 분(紛)’에 ‘잃을 실(失)’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언가를 잃어버려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정도로 치자면 그 무엇보다 사람을 잃는 일이 최고 아닐까? 특히 내 아이, 가족을 잃어버린 그 혼란스러움과 황망함을 무엇과 비교할까. 그러면 ‘분실’이라는 단어를 사람에게 써도 되지 않을까.
부모님은 나를 처음 잃어버렸던 상황을 무용담처럼 말하곤 했다. 엄마가 장사하던 양품점 앞에서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돌쟁이가 갑자기 없어졌단다.
“엄마랑 아빠랑 얼마나 놀랬는지 눈이 확 뒤집혀서 사방을 찾아 헤매는데...”
엄마는 ‘눈이 뒤집혔다’는 표현에서 사뭇 진지했다.
“나중에 경찰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는데 네 얼굴이 말이야, 얼마나 울어댔는지,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서, 완전히 꼬질꼬질해서는!”
‘꼬질꼬질’을 엄청 큰 소리로 강조하면서 슬슬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애가 어쩜 그렇게 쉼 없이 울어대냐고 경찰이 우리를 타박을 하는데, 참 내, 얼마나 민망하던지! 흐흐흐!”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부모님은 히죽 웃었다. 이 에피소드의 결론은 ‘우리 딸은 울보다’였다.
초등학교 때 온 식구가 가락동 수산시장에 갔을 때는 내가 어느새 가족과 떨어져 다른 길에서 헤맸다. 분명히 오빠가 내 이름을 외치는 걸 듣고 열심히 달려가는데 그게 사실은 전혀 반대 방향이었다. 점차 멀어지는 동생을 목이 쉬도록 부르던 오빠는 정신없이 달려와 내 어깨를 잡았다. 엄마는
“네 오빠가 얼마나 열심히 너를 쫓아가던지!”
라며 감탄했다. 이 에피소드의 결론은 ‘믿음직한 큰아들의 갸륵한 여동생 사랑’이었다.
이야기의 결론이 유쾌해질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나를 찾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나를 영원히 못 찾았다면, 결국 찾았는데 몇 년 동안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나를 다시 만났다면 어땠을까. 김영하의 소설 <아이를 찾습니다>가 상상한 혼란과 어지러움이 내 부모의 가슴에 휘몰아쳤을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아버지가 엄마를 ‘분실’한 건 엄마가 뇌출혈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지 몇 달 지난 때였다. 엄마는 치매의 전형적인 증상인 ‘배회증’을 보였다. 아버지가 외출한 틈을 타 혼자 보조기를 끌고 무작정 밖으로 나간 엄마는 차가 다니는 큰길까지 나갔다가 한 행인에게 이끌려 다시 집 쪽으로 돌아와 엄마를 찾아 헤매던 아버지를 만났다.
“할머니가 혼자서 얼마나 위험하게 횡단보도를 건너시는지, 제가 집을 물었더니 이쪽 방향을 가리키시더라고요.”
이렇게 고마운 분이 다 있나. 같은 일이 또 한 번 발생했을 때 엄마는 경찰에 이끌려 돌아왔다. 엄마가 집이 어느 방향인지 알았던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당시 친정과 멀리 떨어져 살던 나는 사건이 종료된 다음에서야 후일담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버지에게 외출 시 집 안에서 못 열도록 문을 잘 잠그고 나가시라고 여러 번 주의를 드렸다.
엄마를 다시 찾았지만 이 에피소드의 결론은 유쾌하지 못했다. 이런 황당한 일을 저지를 정도로 엄마의 상태가 안 좋아졌음을 인지한 가족들의 마음에는 돌덩이가 내려앉았다. 불안해하던 나에게 어느 날 현수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지문 등 사전등록제 : 18세 미만 아동, 지적장애인과 치매질환자 중 보호자가 원하는 사람’
당장 엄마를 데리고 경찰서로 가서 지문을 등록했다. 어린이집이나 집에서 보호자가 24시간 붙어 있는 아이들은 오히려 뒷전이었다. 에피소드의 결론은 유쾌하지 못할지라도 엄마를 영원히 ‘분실’하는 어지러운 일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나서는 절대 안 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