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종은 Nov 10. 2020

엄마의 우울을 들키지 않기

엄마가 무너지면 아이는 세상이 무너진다

산후우울증까진 아니더라도 엄마도 사람인지라 때론 우울할 때가 있다. 아이를 보다가 짜증 날 때도 화가 날 때도 있는데, 무엇보다 숨기기 힘든 감정이 바로 우울감이다. 짜증이나 화가 날 땐 이 쪼그만 아기가 무슨 잘못인가 싶어서 생각보다 쉽게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우울감이 들 땐 도저히 표정관리하기가 쉽지 않다.


아이에게만은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게 하고 싶었다.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도 감정 컨트롤은 뭐가 이렇게 어려운지. 격정적인 감정 기복을 제어하기 위해 속으로 도를 닦는 심정이다. 아이를 대할 때면 내 기분에 상관없이 언제나 웃는 모습이 되도록 노력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것은 인생의 진리다. 하지만 육아를 하다 보면 그동안 쌓아온 체력들을 야금야금 까먹느라 기력이 딸릴 때가 있다. 손목이며 허리며 뻐근하고 아픈 곳도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이렇게 몸이 지치게 되면 어김없이 긍정적이던 정신도 위태로워진다. 별거 아닌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고 우울해지기도 한다.


그날은 체력이 바닥난 날이었다. 남편에게도 오늘은 진짜 힘들다고 사인을 계속 보냈다. 하지만 그날따라 아기는 유독 보채고  평소보다 늦게 잠들어 피곤이 극에 달했다. 간신히 아기를 재우고 침대에 눕히러 갔을 때, 남편은 먼저 침대에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 아기 배게에 툭 하니 손을 올려놓고 아기 이불을 깔고 자고 있는 남편. 남편을 피해 아기를 눕히려니 간신히 재운 아기가 깰 것 같아 짜증이 났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방해를 하다니.


어렵게 아기를 눕히고 뒷정리를 하러 나오는데 가습기에 물이 없다. 대용량 가습기라 물을 채워 넣으면 물통이 꽤나 무겁다. 아이 낳고 손목이 아팠던지라 매번 가습기 물 좀 넣어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하곤 했는데, 이렇게 말을 안 하면 안 해준다. 힘들어하는 거 알면 알아서 좀 해주면 안 되나. 건조해지면 아기가 코 막혀하는 거 뻔히 알면서.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하며 엉망이 되어버린 거실을 바라보며 툭하고 이성의 끈이 끊겼다. 나도 피곤하고 나도 자고 싶다. 하지만 남아있는 집안일이 있어 못 자는데, 남편은 왜 천하태평으로 자고 있는가. 이 모든 집안일은 나만의 일이란 말인가. 이게 다 내가 출근 안 하고 집에  있어서 모두 내 일처럼 된 것 같다. 1년 육아휴직을 취소하고 출근해버리면 남편도 가사분담을 좀 하려나.


간밤의 우울한 감정이 다음날까지 나를 지배했다. 육아가 힘든 것인가 가사가 힘든 것인가. 나는 가정주부는 못하겠다 싶고, 둘째고 뭐고 이렇게 힘들면 다 포기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동굴에 들어가 혼자 가만히 있고 싶다. 결혼 전에 이런 우울감이 덮치면 나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자곤 했다. 그렇게 쉬고 나면 기분전환도 되고 체력을 회복해서인지 다시 기운이 나곤 했다. 하지만 지금 내 옆엔 아직 기지도 못하는 아기가 있다. 힘들고 우울해도 육아는 멈출 수 없었다.


문제는 아기에게 도저히 웃어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울감에 빠져 표정 지을 힘도 잃었다. 결국 엄마의 무표정한 얼굴 근육을 들키고야 말았다. 아이도 이상함을 눈치챈 것 같아 웃어야지, 기운 내야지 생각하지만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아이를 보는 내내 표정이 없어지고 반응도 없어졌다. 그저 아이가 보채면 안았다가 젖을 물렸다가 기저귀를 가는 등 기능적 역할만 수행했다. 평소 같으면 물고 빨고 예쁘다 사랑한다 하루 종일 말을 건네던 엄마가 아무 말도 반응도 없다.


다행히 남편이 일찍 퇴근하는 날이었다. 우울한 엄마 옆에서 지쳐있던 아기는 아빠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구원자가 나타난 것처럼 반가워하는 아이의 표정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옆에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아빠의 등장을 이렇게나 반가워할까. 나의 우울함을 아이에게 날것으로 들켜버리다니. 엄마 자격도 없는 사람 같았다.


눈물을 보이는 모습에 남편이 힘들었냐며 토닥여줬고, 달래주니까 참고 싶었던 눈물이 더 쏟아졌다. 그리고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본 아이의 눈이 커졌다. 꽤나 놀라고 당황한 눈치다.


아이에게 다시는 엄마의 우울감과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다. 내가 무너지면 아이에겐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을 테니까. 철없이 아이 앞에서 우울함을 티 냈다가 아이가 나로 인해 큰 영향을 받는다는 걸 눈으로 봐버렸다.


앞으로도 때론 짜증 나고 화나고 우울할 때가 있을 거다. 하지만 아이 앞에서는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들켰을 때 아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참 제멋대로에 감정 기복이 널뛰기하는 나였는데. 이렇게 엄마가 되나 보다.

이전 09화 눈에 보이는 시간의 속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