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채팅으로 만난 여인 01

― 풀잎의 속도, 그녀

팅으로 만난 여인 01.

― 풀잎의 속도, 그녀


이따금, 아무 이유 없이 말을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목소리가 아니라, 그냥 글자로.

정확히는, 누군가에게 아무 말이라도 건네고 싶어지는 그런 밤이 있다.


라면을 끓이기엔 조금 애매한 시간, TV도 별 볼 일 없고, 일도 하기 싫은 그런 밤.


나는 그런 밤이면 인터넷 창을 하나 열어 두었다.

어디에도 닿지 않는 문장들로 가득한, 낡은 채팅창.


ID는 대충 지었다. '후지필름1967'.

누가 보기에 감성을 부리는 것 같긴 했지만, 사실 별 의미는 없었다.

그냥 처음으로 산 카메라가 후지필름이었고, 1967은 내가 좋아하던 재즈 앨범 발매 연도였다.


그녀는 먼저 말을 걸어왔다.

닉네임은 '풀잎의 속도'.

당연히 가명일 테지만,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 문장엔, 속도가 있지만 소리가 없었다.

마치 그녀가 어떤 감정을 회피하면서도, 한 걸음은 더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라는 걸 암시하는 것 같았다.


“지금 뭐 하세요?”

첫 문장은 늘 비슷하다. 뻔하지만, 뻔하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냥... 커튼 사이로 바람 들어오는 소리 듣고 있어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는 ‘멋지네요’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아직도 겨울 냄새가 좀 나겠네요.”

이상하게,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몇 번 더 채팅을 주고받았다.

날씨 이야기, 요즘 본 책, 최근에 먹은 맛없는 수제버거까지.

모든 이야기는 특별하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편안했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그녀가 먼저 물었다.

“혹시... 얼굴은 모르고 만나본 적 있어요?”


나는 창밖을 내다봤다.

전날 내린 비로 거리는 촉촉했고, 가로수는 어둠 속에서 움직임이 없었다.

“한 번 있어요.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른 채 하루를 함께한 적이 있어요.”

나는 그렇게 썼다.


그녀는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리고, 아주 짧게 말했다.

“그런 건, 무섭지 않아요?”


나는 “가끔 무섭지만, 그보다 외로운 게 더 무서운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제야 답장을 보냈다.


“저도요. 그리고… 혹시 저랑 커피 한 잔 하실래요?”




keyword
이전 09화[단편] 건축가와 건축주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