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건축가와 건축주 04

― 되돌아보는 조용한 밤

건축가와 건축주 04.

― 되돌아보는 조용한 밤


밤은 늘 같은 방식으로 찾아온다.

불이 꺼진 복도,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의 침묵,

식탁 위에 놓인 물컵에 희미하게 비친 형광등 불빛.

내가 사는 아파트의 밤은 매일 조금씩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반쯤 열고, 책상에 앉아 있었다.

음악은 켜지 않았다.

이런 밤에는 음악보다 더 조용한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멀리서 들리는 누군가의 발소리라든가,

전자레인지가 꺼질 때 나는 작은 ‘띵’ 소리 같은 것들.


책상 위에는 아직 엽서가 놓여 있었다.

그녀의 손글씨는 잉크가 조금씩 바랬고,

엽서 모서리는 살짝 말려 있었다.

나는 그걸 펴지도 않고, 쓰다듬지도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두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집을 짓지 않았다.

도면을 펼쳐도 마음이 따라오지 않았다.

의뢰는 있었지만, 대부분은 다른 동료에게 넘겼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그 사이, 몇 번의 계절이 지났다.

겨울이 왔다가,

다시 봄이 오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스케치북을 꺼냈다.

아무 말 없이 선을 몇 개 그었고,

선은 곡선이 되었다가, 다시 직선으로 돌아왔다.

그건 집의 윤곽도, 구조도 아니었다.

그저 어떤 감정의 윤곽이었다.


나는 예전에도 이런 밤을 보낸 적이 있다.

아내와 이혼한 뒤,

처음으로 혼자 사는 공간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

그때도 이렇게 밤이면

물컵과 창문 사이에서,

오랫동안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곤 했다.


사람이 떠나고 나면,

어떤 감정은 집 안에 머물러 있다.

낡은 목재 틈, 문고리의 체온,

욕실 타일 위로 떨어지던 물방울의 시간.


그 감정들이 나를 흔들지는 않았지만,

가끔 무게를 남기고 갔다.

그건 가벼운 슬픔이었고,

때로는 나를 살아 있게 하는 유일한 진동이기도 했다.


새벽 2시쯤,

나는 조명을 조금 어둡게 낮췄다.

그녀가 말했던 조도의 수준으로.


책상 위의 스케치를 덮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놓치고 싶지 않은 밤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가장 조용한 증거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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