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 / 이후
수전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는 우리 일상생활에 자리 잡고 있는 사진에 관한한 가장 포괄적이고 심층적인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저작이다. 사진에 관한 에세이라고 하지만 가볍게 읽히지는 않는다. 이 책을 옮긴이의 후기를 인용해 보면 조금이나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사진에 관하여』는 저자가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손수 정리해 들려준다거나,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를 확인만 시켜주기 바라는 독자들의 바람을 완전히 저버리는 책이다. 오히려 손택은 이 책을 쓰면서 서로 상반된 주장, 인용, 자료 등을 태연히 ‘병치’해 놓는 방법을 택했다. 요컨대 손택은 자신의 문학적 행위예술을 통해서 독자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방법을 택한 셈이다.
전통적인 수사법, 이를테면 서론, 본론, 결론과 같은 형식을 취하지 않는 방식 때문에 계획된 집필의도보다는 마치 마인드맵처럼 의식을 확장시켜 가는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자의 후기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이 탄생한 이유를 보면 ‘손택이 4년에 걸쳐 『뉴욕타임스 서평』에 기고했던 여섯 편의 에세이’에 근간을 두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저작 탄생의 기원을 살펴본다면 오히려 이 책은 포괄적인 접근을 지양하고, 에세이별로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주효할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플라톤의 동굴에서’에서 보여주는 사진은 이미지를 창출하는 매체로서 접근한다. 고로 저자의 주장처럼 ‘사진을 수집한다는 것은 세계를 수집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소개된 일화처럼 고다르의 영화 「기관총 부대」에서 등장하는 세계의 온갖 유물의 사진이 담긴 우편엽서는 부랑자들의 전리품이라고 하기엔 다소 의외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이런 영화에서 담고 있는 사진에 대한 우화는 이제 더 이상 사진이 인류의 생활과 동떨어질 수 없는 어떤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실에 도달한다는 것이 결코 낯설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진에 찍힌 대상을 전유한다는 것이다.
이런 자각은 저자가 세계와 특정한 관계를 맺기 위한 방편으로서 사진의 활용가치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문구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은 축소, 확대, 수정, 혹은 버릴 수 있는 대상으로 가변적 특성을 점유한다. 또한 사진은 증명의 대상으로서도 기능한다. 회화나 산문 등에서 찾아낼 수 없는 실체적 진실, 피사체의 특정한 기준에 접근할 수 있는 용이성을 증명하는 매체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결혼사진 등을 비롯한 각종 축하의식에서 사진은 그 역할을 도도히 수행해왔던 것이다. 이런 사진은 점차 여행으로까지 확대된다. 여행에서 사진을 빼놓는다는 것은 이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기록으로서의 사진은 그렇게 인류의 삶에 서서히 착근되기 시작한다. 상상하고 참견하고, 침범하고 왜곡하고 착취할 수 있게 된 인간의 분출된 욕망을 사진의 특성과 결부시키는 저자의 발상은 마이클 포웰의 영화 <관음증 환자>로 옮겨간다. 카메라에 필름을 넣는다, 카메라를 들고 겨냥한다, 필름을 박는다는 표현에서 저자는 카메라와 관련된 사람들의 환상을 읽는다. 또한 사진을 만들어내는 카메라는 중독성으로서의 기계로 전락하는 현실과 마주하기도 한다.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분쟁, 특히 베트남전에서의 참상은 사진이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내밀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이 에세이의 마지막에서 사진의 가용성에 마침표를 찍는다.
19세기의 가장 논리적인 유미주의였던 말라르메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국 책에 씌어지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것들이 결국 사진에 찍히기 위해서 존재하게 되어버렸다.
미국, 사진을 통해서 본, 암울한
이 에세이의 시작은 월트 휘트먼의 문화론 관점으로 접근한다. 미와 추, 중요한 것과 시시한 것의 차이를 살펴보려는 노력에 더하여 솔직, 담백함을 대단히 찬양했다고 기술한다. 저자가 처음에 이렇게 월트 휘트먼을 언급했던 것은 사진이 등장초기 이상화된 이미지가 될 것이라고 예견되었던 현실을 벗어난 작가의 등장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 태생의 미국 사진작가인 스타이켄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이 에세이의 첫 삽입된 사진은 「우유병, 봄」이라는 작품이다. 아주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일반 건축물의 철제난간에 놓인 우유병의 모습은 이런 인공물을 비집고 들어오는 나뭇가지에 배인 봄의 이미지와 중첩되어 묘한 이미지를 탄생시킨다.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전혀 아름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이 사진은 그동안 사진이 가지고 있던 미적인 이상에 대한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난도질 한다. 사진 등장초기 이상화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개념의 사진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했던 것이다. 고로 아름다움과 추함의 이분법적인 경계를 모호하게 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 대상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근저에는 피사체로서 대상이 지니고 있는 가치가 현실적인 모습으로 발현될 때 진정한 사진의 속성이 드러날 수 있음을 간파한 저자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확실히 아름다워질 수 없는 피사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사진 속에 담겨진 피사체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 걸 맞는 미적 향취를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종착역」이라는 작품을 설명하는 글에서 보면 1893년 사진이 발명된 이래 사진은 실용적 목적을 가진 기록 사진, 창조적인 표현을 지향한 예술 사진이라는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는 문구를 접할 수 있다. 이 사진이 의미 있는 이유는 ‘사진의 독자적 예술성’을 구축했다는 평을 받는 스티글리츠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에는 또 다른 사진작가가 등장한다. 바로 다이안 아버스이다. 다이안 아버스에 대한 언급은 이 에세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만큼 당대의 사진작가로서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저자가 언급했던 것처럼 아버스는 ‘드러내놓고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을 찍는데’만 관심을 가졌다. 소개된 사진 중 하나인 「카니발에서 칼을 삼키는 색소결핍증 환자」라는 작품은 평생 동안 거의 한 번 보기도 쉽지 않은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소재를 다루고 있는 그의 작품들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평한다.
아버스의 사진이 뛰어난 이유는 사진 속의 피사체가 우리의 감정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한데 반해 그 분위기는 냉정하고 무미건조할 만큼 정중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그의 사진을 ‘불행한 의식’으로 간주하는 저자의 생각에서 기인한다. 아버스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소재의 사진들은 저자의 조국인 미국의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또한 보통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상황들에 접근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는 미적감수성에 대한 예찬을 통해 한 사진작가가 바라본 시선의 가치를 사진의 관점에서 재해석 한다는 것은 저자가 보여준 통찰의 깊이를 드러내줄 수 있는 바로미터라고 하겠다.
우울한 오브제
이 에세이에서 핵심 단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초현실주의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초현실주의가 관여한 산문, 연극, 아상블라주, 사진 중 가장 성공했던 분야는 사진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진의 초현실주의가 회화, 연극, 광고와 같은 다른 예술에 장식처럼 도입해 써먹곤 했던 갖가지 관행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폄하하는 작가의 태도를 보아서는 이 사조 또한 사진이라는 분야에서는 큰 영향을 발휘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초현실주의는 항상 사건을 일으켰고, 우연을 반겼으며, 무질서를 즐겨왔다.
이 문구를 보면 작가가 바라보는 초현실주의에 대한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초현실주의를 부르주아지의 불평 같은 것으로 여기는 태도 또한 이런 인식과 일맥상통한다. 사진은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초기의 사진 작품들이 지나치게 이상주의화한 것은 기록의 중요성보다는 예술적 환상에 도취되었던 이유가 크다. 그런 측면에서 이 장에서는 기록적인 측면에서 사진이 보여줄 수 있는 현실성에 천착한다. 밥 아델만의 『몰락하는 고향』이라는 사진집을 통해 인생의 패배자들을 호의적으로 기록해 놓은 책이 탄생한 배경에는 사진 작품으로서 당대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려는 당시 사진가들의 의식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당시에 일어났던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은 사진이 더 이상 기록적인 역할에서 제외될 수 없는 사회적인 가치를 함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은 필연적으로 현실과 모종의 거래를 한다’는 저자의 인식은 현실을 재조명하는 도구로서 사진의 가치를 한층 고양시킨다.
시각의 영웅주의
저자는 말한다. 카메라가 발명된 뒤 시각의 영웅주의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고. 개성과 감수성을 충족시킬 피사체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이제 문화적, 계급적, 과학적 탐험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이렇듯 새로운 세계와 영역에 대한 도전은 사진기술의 발전으로 가능해졌고, 단순히 인간이 볼 수 있었던 사물을 그대로 포착하는 한계에서 벗어나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을 확대해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항공기나 우주에서나 볼법한 장면들을 보는 것도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시각의 영웅주의는 이처럼 평범한 환경이나 조건에서 찾아낼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포착하고, 이를 통해 남들보다 우월적 지위를 얻으려는 인간 욕망의 한계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사진의 복음
이 에세이에서 저자는 사진을 ‘대중적인 형태의 모더니즘 지향을 가장 성공적으로 전파하는 수단’으로 정의한다. 아주 오랫동안 회화에서 머물렀던 대중들의 시선이 근, 현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매체인 사진에 의해 예술의 지형도를 변화시켰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비록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사진을 평가하는 언어는 극히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사진의 역사가 길지 않았던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술 평가의 잣대가 되는 비평의 역사가 일천한 것은 오랜 세월 동안 회화를 중심으로 이어져왔던 예술의 전통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에도 사진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를 발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저자의 직설적인 표현에서도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사진은 벼락출세하듯이 무대에 등장해, 이미 세인의 공인을 받은 예술(즉, 회화)을 침해하고 뭉개버린 듯하다.
이런 도발적인 현실이 가능했던 것을 저자는 사진과 회화가 휴전했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사진과 회화의 양분된 예술의 영역은 비록 늦게 탄생했지만 괄목한 만한 성장을 거둔 사진이 기존 예술인 회화의 아성에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월터 페이터의 격언을 인용한 것도 예술의 범주에서 사진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일층 커진 현실을 반영한 것일지 모른다.
이미지 – 세계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지만 때론 의도적인 이미지의 조작으로 전혀 다른 결과를 양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저자가 포이에르바하의 서문을 인용하면서 ‘사물보다 형상을, 원본보다 복제를, 현실보다 표상을, 본질보다 가상을 선호’한다는 표현은 사진과 이미지에 결부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듯하다. 다양한 형태의 사진은 그 본질적인 의미와는 상반되게 왜곡된 이미지를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저서에도 언급한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어린 소녀들’이라는 사진을 보면 밝게 웃는 어린 소녀들의 미소 뒤에 정치적으로 왜곡된 추악한 현실이 내재되어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이렇듯 이미지는 시대와 환경,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으로 파급효과를 남길 수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가 이미지까지 다룰 수 있는 생태학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언급은 이미지의 중요성을 한층 부각시킨다.
수전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는 현학적인 내용이 많아서 에세이라기보다는 철학서처럼 읽었던 책이다. 에세이별로 파편화된 주제는 때론 연관성도 있고, 이질적인 면도 없지 않았지만 사진이라는 새로운 예술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수전 손택이라는 저자를 알게 된 것 또한 수확이라면 큰 수확이다. 무엇보다도 사진의 탄생과 관련된 역사에 대한 고찰을 통해 여태껏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사진에 대한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보편적인 예술로 자리한 사진이 이미지 왜곡을 통해 대중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표상하는 것이 사진이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을 한순간에 허무는 수전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를 통해 사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