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 / 이후
『사진에 관하여』란 책을 쓴 수전 손택의 저작을 처음 접했을 때, 앞으로 글쓰기 롤 모델로서 저자를 택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인류가 만들어 낸 수많은 문명의 이기 중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인간의 본성에 접근할 수 있었던 저자의 뛰어난 통찰력에 매료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타인의 고통> 또한 그런 연장선상에서 다소 철학적이면서도 생각해 볼 만한 사유를 가질 수 있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가?
이런 물음을 던지고 있는 <타인의 고통>은 최근 이태원 참사를 비롯하여 아직까지 그 상흔이 아물고 있지 않은 세월호 참사를 겪었던 우리 사회에서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책의 저자인 수전 손택은 다소 현학적이고 난해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 우리를 당황시키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간과하고 있던 것들을 되새김질하게 해 주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진리에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 주는 선량한 인도자의 길을 수행할 뿐이다. 수전 손택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대목은 책의 첫 장을 넘기면 곧바로 나타난다.
손택의 현실 참여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 중이던 196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대의 유명 시사지 『파르티잔 리뷰』에 「지금 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기고, “미국은 대량 학살 위에 세워졌다” “미국적 삶의 특성은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향한 모독이다”“백인은 역사의 암이다” 같은 숱한 독설로 미국의 은폐된 역사, 베트남 전쟁의 허위, 아메리카 드림의 실상을 폭로했던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대목을 보면 수전 손택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타인의 고통>은 저자의 전작 『사진에 관하여』 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 저서이다. 이 책에서도 사진은 중요한 소재로 다가온다. 다만 전작인 『사진에 관하여』가 보편적인 사진의 가치와 이미지에 천착한 것이라면, <타인의 고통>은 책의 제목과 연관된 사진 이미지에 대한 고찰이 주를 이룬다는 것이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읽다 보면 다소 거북하고 불편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런 느낌을 갖는 데는 사진 이미지가 커다란 역할을 한다. 실제로 이 책의 원판이 소개된 책 첫 부분의 흑백 도판을 보면 목이 매달린 시체를 바라보고 있는 모자를 쓴 중년 남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책 표지의 이미지에서 저자가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수전 손택의 이런 도발적인 의지의 근저에는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리는 비정한 현실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저자의 관점에서 타인의 고통을 한낱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로 전락시키는 세상은 포장된 쇼윈도 부부처럼 더 이상 진실을 담보할 수 없다. 주류 대중매체에서 수전 손택이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에서 ‘동시대 미국 문단의 악녀’로 폄하되기 시작한 것도 진실을 파헤치기 주저하지 않았던 저자의 성정에 기인한다. 이는 9·11 사건 직후 미국 사회에 불어닥친 반이성적인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했던 일화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저자는 9·11 사건을 두고 다음과 같은 태도를 견지했다.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이는 당시 수많은 매스컴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미국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을 옹호했던 상황을 두고 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기에 부시 행정부의 테러정책은 곧, “사이비 전쟁을 위한 사이비 선전포고” 일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미디어는 때때로 왜곡되고 진실에서 멀어진 이미지를 대중에게 퍼뜨리는 경우가 많다. 수전 손택이 사진, 특히 전쟁이나 기아 등이 담긴 사진 속에서 비판의 메스를 가하는 것은 그만큼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일깨워준다. 가령 이 책 첫 부분에 흑백 도판으로 수록된 「비아프라 내전 당시 고통받는 어린아이, 1969」라는 사진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진을 통해 인식하는 이미지가 얼마나 몰이해에 기반한 것인지 잘 드러내주고 있다. 사진 속에는 기아에 허덕이는 모습을 한 어린아이들이 보인다. 갈비뼈가 드러나고 배만 볼록 튀어 난 모습을 하고 있는 두 손을 들고 있는 벌거벗은 두 아이들 옆으로 상체에 허름한 옷을 걸친 두 다리가 삐쩍 마른 아이의 표정은 마치 노인의 그것을 닮았다. 이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수록되어 있다.
타인의 고통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그런 고통이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 즉 가난한 나라들에서만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하곤 한다.
문제는 이런 이미지메이킹이 과거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 세계관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나 주검이 담긴 사진들이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들을 대하는 대표적인 매체인 사진은 저자의 관점대로라면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와 동일시된다. 소위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도발적인 인식은 사진으로 표상된 비극적인 현실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저자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타인의 고통>을 쓰기 시작할 무렵 들었던 의문 중 하나는 끔찍한 참사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전 세계에서 수도 없이 발생하는 참사 현장은 실시간으로 지구촌에 중계되고 있고, 이런 잔혹한 이미지들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감각은 점차 무뎌지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잔인하게 묘사된 폭력에 익숙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분쟁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염려한다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지 궁구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디언』에서 <타인의 고통>을 평한 문장을 보면 현실 속에서 비치는 우리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오늘날 같은 ‘방관의 문화’에서 우리는 충격받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을까? 『타인의 고통』에 따르면 그 대답은 우리가 타인의 지나친 욕망을 어떻게 바라볼지, 또는 진실을 얘기해 얼마나 고통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종종 유튜브 등의 뉴미디어에서 음모론을 접하게 되지만 그것이 현실과는 별개의 ‘꾸며낸 진실’이라고 폄하할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관련된 사실을 파고들다 보면 그런 판단이 때론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진실을 내포하는 경우와 맞닥뜨리기도 한다. <타인의 고통>에서 주장하는 내용 또한 어찌 보면 그런 음모론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저자가 참고문헌을 토대로 사진의 속성에 드러나는 진실에 접근하다 보면 그것이 뜬금없는 주장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타인의 고통>은 전작인 『사진에 관하여』라는 저작의 2탄으로 봐도 좋을 만큼 사진에 대해 많은 비중을 할애한다. 책 제목처럼 ‘고통’이라는 키워드로 사진에 접근하는 양상을 띠지만 실체적으로 살펴보면 사진을 빼곤 설명할 수 없는 주장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더라도 궁극적인 지향점은 전쟁이든 이와 관련된 참상이든 ‘타인의 고통’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 전작과의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진 하면 조작할 수 없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이 매체에 신뢰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사진이 오히려 조작하기 쉬운 매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포토샵과 같은 소프트웨어 툴을 통한 직접적인 조작에서부터 사진의 원천이 되는 피사체의 조작에 이르기까지 이 현대 문명의 이기는 그 본연의 가치인 대상물의 시점 포착이라는 본질에서 멀어져 다양한 방식으로 거짓을 양산해 내는 도구로 인간들의 손에서 자리하게 된다. 이를테면 비록 조작은 아니더라도 진실에서 멀어져 현상만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누를 끼칠 수 있는 사례도 목격할 수 있게 된다. 에디 애덤스의 「처형당하는 베트콩 포로」라는 사진이 그렇다. 이 사진은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전해주는 대표적인 사진이다. 사진을 보면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기 직전의 장면을 담은 것처럼 보이지만 피살 직전의 피해자는 실제로 경찰을 살해한 혐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타인의 고통>에서 다루고 있는 사진들은 우리가 흔히 보던 사진의 범주를 넘어선다. 의도적으로 잔인한 장면을 배치한 것은 아닐 테지만 로렌스 바이틀러의 「린치 당한 토머스 십과 에이브럼 스미스」나 작자 미상의 「백 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을 목격하고 이와 관련된 배경지식을 알게 되면 인간의 잔인성에 혀를 내두를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타인의 고통을 사진을 통해 목격하는 일을 저자는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라고 규정한다. 최근 이슈가 된 빈곤 포르노 논쟁 또한 사진의 폐해가 가져다 준 적절한 예일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저자는 사진≒ 전쟁이라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문법을 도식해 낸다. 사진을 통해 전쟁의 참상이 대중에게 각인되지 않는다면 전쟁은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진을 통해 드러난 참상은 그대로 대중들을 자극하고, 그것은 그 자체로서 이슈의 정점의 설 수밖에 없다. 9·11 테러 직후 미국이 행한 걸프전의 양상은 CNN이라는 괴물 미디어를 탄생시켰지만 이 미디어가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은 고작 전쟁을 전자게임 수준으로 전락시킨 것뿐이다. 고성능의 드론이 실제의 목표물을 향해 폭격을 가하더라도 그 장면을 통해 살인의 현장을 목격하기는 불가능하다. 마치 게임의 한 장면처럼 폭발을 잠시 응시할 수 있지만 그런 이유로 실체적인 참상을 볼 수 없다고 해도 그 현장이 비극적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진들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때론 관음증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사진의 위력은 곧잘 정치세력들의 먹이가 되어 연출된 사진을 양산하기도 한다. 예프게니 칼데이의 「독일 국회의사당 위에서 나부끼는 깃발」이나 작자 미상의 「네덜란드 하우스 도서관」이라 제목이 붙은 사진을 보면 그 누가 봐도 연출된 사진임을 직관할 수 있게 된다. 히틀러가 나치의 선전장관으로 임명한 괴벨스의 활약을 보더라도 미디어 조작은 대중을 현혹시키는 대표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정치가들이 미디어에 큰 공을 들이는 것은 이런 전례를 학습해서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에서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빚어내는 사실을 담는 속성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의도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진실에 멀어진 피사체를 창조해 낼 수 있음을 간파한다. 책의 제목이 <타인의 고통>이지만 실제적으로는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사진이 주는 의미’라고 해도 될 만큼 사진 속에 비친 고통의 양상을 다양한 시각과 해석적인 견지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미학 오디세이』의 저자 진중권 작가의 평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미지를 바라보는 관점이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사유의 스펙트럼을 확장시켜 준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미지들,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사람이 고통스럽게 된 데에는 세계가 다 엮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그 사람의 고통이 곧 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연민을 갖는 것. 이제 그것을 되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