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드보르 / 울력
아방가르드 예술가, 아나키스트,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이 무시무시(?)한 이력이 이 책을 지은 저자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풍기는 이미지 또한 범상치 않다. 본문의 첫 장을 열어보면 본문보다 각주가 몇 배나 된다. 단 세 줄 뿐인 본문은 몇 번을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다. 난감하다.
그렇다. 이 책은 난감한 책이다. ‘스펙타클’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광경’, ‘장관’, ‘정경’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스펙타클의 사회>라면 이런 시각적인 이미지에 충실한 사회, 보이는 것이 전부인 사회에 대한 비판을 쓴 내용이라고 연상하기 쉽다. 나 또한 그런 줄 알고 책을 읽었다. 그런데 도무지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책을 읽고도 이렇듯 멍한 느낌이 든 적은 없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다.
옮긴이의 말을 인용해 보자면 ‘<스펙타클의 사회>는 일종의 정치적 시론으로서......, 마르크스와 루카치의 논증을 바탕으로 풍요가 엄습하는 20세기 서유럽에서 탄생하고 있는 상품 물신의 새로운 형태인 「스펙타클」을 개념화하고 그것에 대한 자각을 요청하고 있다(책날개 뒤표지 인용)’고 한다. 이 책의 개괄적인 소개 글이지만 뭔가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상품 물신의 새로운 형태인 「스펙타클」을 개념화하고......’ 이 부분에서 대략적으로 물신화된 상품이 판치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 저작이라고 이해할 만한 단서를 발견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원문을 찾아들어가 보면 이와 관련된 글귀가 눈에 띈다.
스펙타클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발전하는 경제이다. 스펙타클은 상품생산의 충실한 반영이며 생산자들의 기만적인 대상화이다.
이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저작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이다. 모든 것들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현실 비판적인 목소리는 이 책에서도 다르지 않다. 이 책의 저자가 아무래도 마르크스주의자이다 보니 마르크스의 저작인 《경제학-철학초고》, 《헤겔 법철학 비판》,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정치경제학 비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신성가족》등에서 나온 내용들을 전용하는 경우가 많은 데 이는 아직 이런 저작들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터라 그저 이 책의 내용과 관련된 배경지식 정도로만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스펙타클의 사회>는 전체적으로 난해한 책이다. 한두 번의 통독으로도 대략적이나마 내용을 가늠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어렵기로 악명 높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이해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상존해 있는 만큼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이해한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지적 수준에 이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마치 <정의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존 롤즈의 《정의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렇게 난해한 저작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책이 비록 현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 하더라도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사상적으로 좌편향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인류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일조한 것만은 확실하다. 더군다나 자본주의에 관한 사유를 위해서는 필독서로서 자리매김할 만큼 자주 언급되는 저작이기에 읽어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리라고 본다. 다만 이 책을 읽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과는 괴리감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단 시일에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서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미칠 듯이 공감할 것이다.